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유 Feb 16. 2020

눈 속의 외출

눈 내리는 일요일

내가 본 안암동 골목의 모습.

 

 눈이 온다. 올해 들어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날은 처음이다. 눈이 예쁘게 온다며 나에게 전화를 해 준 사람이 있었다. 무심코 버스의 오른쪽 줄에 앉아 창 쪽을 바라보는데 광고 배너로 창문이 막혀 있어서 아쉬웠다. 이런 날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버스 맨 앞자리는 다른 자리들보다 높다. 그래서 성질이 급해 얼른 출발하는 운전기사의 차에 타면 앉기가 불편하다. 대신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에서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은 공상을 할 수 있게 된다. 버스의 가장 큰 창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광고 배너 옆자리에 앉아 맨 앞자리에는 누가 탈지 지켜봤다. 한 자리는 비어 있었고, 다른 자리에 앉은 사람은 휴대폰 게임을 했다. 그러기에는 아까운 풍경이었다.

눈이 오면 여태껏 아무렇지 않았던 풍경도 새롭게 다가온다. 안암에 온 이유는 약속 시간까지 여유롭고 가득 찬 (둘은 모순되어 있을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친구가 일하는 아주 조용한 카페에 오기 위해 눈을 잔뜩 맞았다. 우산이 있어도 비를 맞는 사람은 잘 없어도 우산을 접은 채 가만히 눈을 맞는 사람은 있다. 안암의 골목골목에는 아직 철거하지 않은 한옥집들이 있다. 과거에는 안암동과 보문동 일대가 한옥마을이었다던데, 그 흔적인지 모르겠다. 낡게 내려 앉은 기와 지붕들 위로 굵은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사실 보다 말고 동영상을 남겼다. 다들 그런 마음이겠지만, 같은 눈이 내려도 바뀌는 배경에 따라 다르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눈이 오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날씨의 섭리와 반대로 가는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 맥락도 없이 옛날 생각에 빠진다. 사실 그렇게 옛날이 아닌 일들이라도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토론토에 있던 나, 지금 이 카페에서 차를 시키고 세미나에 참여하던 나. 전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지금의 내게는 소속이 없다. 지금의 내게는 (어쩌면) 정체성이 없다. 한동안 내가 추구하던 것들은 생계와 생존, 변화에 대한 적응, 그런 상황들이다. 이사를 갔고 걱정을 했다. 눈이 오는 오늘에야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별 생각 없이 통장 잔고를 봐 버리고 말았다. 경솔한 나.

  다시 아득한 옛날과 사라져 버린 나, 그게 아니라 눈 이야기로 돌아와서. 오늘의 눈은 많이 내렸다가 그쳤다가 한다. 이상하게 걸어야 할 때마다 눈이 쏟아지고 자리에 앉으면 눈이 잦아든다. 최근 일주일동안 같았으면 그마저도 짐스럽고 화가 났을 텐데, 오늘 아르바이트 구직에 성공해서인지 그냥 내가 눈을 몰고 다니는 사람인가 싶다. 눈이 많이 내리면 다시 옛날 생각에 잠기고, 몸이 따뜻해지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고, 몽상을 하고… 눈을 잿더미라고 여겼던 어느 날을 떠올리면 그때에 비해 사는 데 성의는 없고 더 메말랐을지라도 오늘이 더 좋은 듯하다. 눈은 잿더미가 아니라 눈이라고 여기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