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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Apr 29. 2020

여0생의 필연

나만의 경험은 아니고

  울산의 한 남성 초등학교 교사가 논란이다. 해당 교사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sns나 유튜브 계정 등 공개적인 공간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마치 아닌 것처럼) 시인한 흔적도 적발되었다. 이 교사를 공론화한 학부모는 자신이 올린 글에 그 교사의 피해자가 댓글을 단 것을 보고 글을 절대 내리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분노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나를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성추행으로 인식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남교사에 의해서였다. 그는 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고, 나도 그 선생님을 무척 따랐다. 그런 그가 아이들이 서른 명 넘게 모여 있는 교실 안에서 내 몸을 만졌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사건이 성추행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성추행은 남의 나라 일 같았다.  '정상적인' 여자 아이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난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에게 장난처럼 털어놓았을 뿐이다. (그 친구 또한 그것을 성추행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 그 일을 그 애가 기억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후, 몇 년이 지나고 우연찮게 난 그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아이에게 내 성추행 경험을 털어놓을 일이 생겼다. 내가 성별을 말하지 않고 이야기해서인지,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그걸 성추행이라고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날 대화의 좌절감은 도리어 그것이 정말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는 증폭제와 같았다. 그 친구도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온 세상이 성추행을 '가벼운 터치', '딸 같아서 하는 표현', '친밀함의 표시'라며 보기 좋게 라벨링 하는 와중에 그 아이의 내면에서 성추행의 기준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난 그 아이를 옹호할 수 없고,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대학을 다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수도 없이 떠올랐다. 대여섯 살이던 내게 딸 같이 예쁘다며 뽀뽀하던 태권도장 사부, 아이들의 팔뚝살을 굳이 잡던 중학교 때 체육교사, 남자아이들과 더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공공연하게 말하던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왜 남성 교사들은 여자 선생님들도 하지 않는 여자 아이들 치마 단속을 해댔을까 자연스레 의문을 품게 되고.

  미투가 한창 사람들 사이의 화제이던 시절, 모교의 한 남자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자신이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 아이들이 예뻐서 예쁘다고 하고 머리를 쓰다듬던 것도 성희롱이냐는 물음이었다. 마음속으로 당연히 성희롱이지요,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당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 있죠' 따위로 아주 완곡하게 답했던 기억이 있다. 납득이 되는 상황상의 이유들이 있음에도 난 후회가 된다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게 떠들 때 사람들이 성찰을 하게 됨을 그때 느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더 이상 여학생들에게 그러지 않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왜 당연하게 틀렸음이 이야기되지 않는지 의문이다. 어째서 수많은 학생들이 그 과정을 목격해야 하는지, 상처 입어야 하는지, 그땐 모두가 그랬다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어떤 상처와 피해를 증언했을 때 '그럴 수 있지 않나?' 따위의 반응을 들어야 하는지...넘치는 물음표들 사이로 난 숨 쉬듯 일어난 사건들을 외면하거나 실제로 몰라서(혹은 모르려고 해서) 맑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고, 그래서 더 마음 아프다.) 더 큰 잘못을 그 사람들이 한 건 아니지만, 하는 수 없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의 경험, 그리고 무수히 일어난 타인의 증언들을 떠올리며, '그러려니'보다는 분노가, 분노보다는 온전한 평화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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