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동기 언니가 시를 필사해 집으로 보내줬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주소로부터 웬 우편물이 와 있어서 의아했다. 하지만 시 배송받기는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언니가 인스타에 시 필사본을 받고 싶은 사람을 모집하는 글을 올렸는데 내가 냉큼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한 편, 그리고 밤에 한 편 시를 읽었다. 아직 한 편은 남아 있다. 손글씨로 쓰인 시를 읽으니 기분이 좋았다.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아무 데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고민은 아무 결론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식탁 앞에서 허송세월을 했다. 원래 해야 하는 일은 하는 둥 마는둥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언니가 손으로 옮겨 써 준 시가 생각났다. 나에게도 필사 노트가 있다. 수능 끝나고, 글씨 쓰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동네 친구와 각자 책을 필사했다. 나는 그때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옮겨 썼다. 그때 쓴 걸 보니 내 글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그 뒤에는 휴학 시절에 옮겨 쓴, 토니 모리슨의 '재즈'의 일부가 있다. 교환학생 시절에 손미의 시를 옮겨 쓴 흔적도 있었는데, 그게 마지막 흔적이었다. 보통 필사를 하면 책의 구절보다는 노래 가사를, 교과서 여백이나 공책 끝자락에 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 듯하다.
만년필
시를 옮겨 쓰려니까 특별한 펜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생각난 펜은 작년에 선물 받은 만년필이다. 한 번도 못 써보고 고장 내 버린, 중학교 때 산 라미를 제외한다면 내 인생 첫 만년필이다. 교환학생을 갈 때 가져갔는데 잉크가 동나서 한동안 못쓰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만년필 생각을 계속했지만 잉크 생각을 못하다가 드디어 얼마 전에 리필을 할 수 있는 병 잉크를 샀다. 잉크는 짙은 푸른색이다. 만년필을 선물 받고 처음 써봤을 때, 검은 선이 아닌 파란 선이 나와서 당황했다. 하지만 난 푸른색이 좋고 내 첫 만년필의 푸른색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만년필을 선물해 준 사람은 애인이다. 왜 하필 만년필이었는지 당시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애인은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책과 인터넷 문헌을 가리지 않고 글 자체를 읽는 건 좋아하는 듯한데 문학에는 관심이 없고, 글을 쓰는 데도 취미가 없다. 시를 읽고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나도 애인도 매한가지다. 나는 시 전체를 알아들을 수 없어도 마음에 꽂히는 한두 행 때문에 시를 좋아하게 되는데, 애인은 그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나 보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언젠가 습작한 시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 글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고 그때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아주 옛날에 보여준 글을 여전히 불쑥 떠올려낸다. 나는 그 마음이 만년필이라고 생각한다. 푸른 펜으로 글을 쓰는데 가끔씩 노란색이 보이는 이유다.
파커 사의 볼펜
특별한 펜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펜이 하나 더 있다. 출국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간 합평회였다. 입대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합평회에 온 친구(C라고 하자)도 있었다. 우리는 평소와 달리 혜화동까지 나가 칼국수를 먹었다. 시집 전문서점인 '위트 앤 시니컬'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교수님이 칼국수집을 너무 열심히 찾아 주객이 전도된 듯했다. 양도 많고 맛도 좋은 칼국수를 먹고 있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나와 C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검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안에는 볼펜이 들어 있었다. 문구점에서 제트스트림만 사던 내가 좋은 볼펜을 가져 본 첫 순간이었다. 나는 아랫부분이 푸른색인 펜을 골랐다. 윗부분의 메탈 느낌과 어우러져 차분한 분위기를 내는 펜이다.
친구는 사정상 합평회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여전히 시를 열심히 쓰고 있다. 그는 내게 어디에서든 이 펜으로 계속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이 펜을 선물 받던 그날부터 거의 매일 같은 펜으로만 일기를 썼다. 펜은 몬트리올과 쿠바,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따라다녔다.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내가 원래 갖고 있던 마음과 감성을 잃는 것 같을 때마다 펜을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그 마음이 고맙다.
필사
내 글씨. <영원 무렵>, 박은정
이것도 내 글씨. <인공과 호흡>, 최정진
결국 두 가지 펜으로 시 한 편씩, 총 두 편의 시를 옮겨 썼다. 역시 요즘에는 한 가지 일에 온 마음을 다하기가 힘들어졌다. 시를 옮겨 쓰는 일이라고 다르지 않나 보다. 그렇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라도 잘못 쓴 글씨를 만들지 않으려 했다. 엉킨 마음의 한 갈래를 건드려 주는 언어를 품은 시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글을 옮겨 쓰게 해 준 여러 마음들을 기억했다.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아야 할 마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