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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Oct 11. 2020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운 오늘날의 본질


독일에서 교환학생 한 친한 언니가 요즘 날씨가 독일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나도 요즘 날씨엔 캐나다가 떠올라, 답했다. 일년 전 이맘 때는 퀘벡에서 갓 돌아왔다. 

  일요일. 낮에 언니와 수다를 떨다가 얼마 전 재미 들린 구글맵 스트리트뷰로 언니가 교환학생으로 다녔던 학교 주변을 보여줬다. 오랜만에 추억의 동네를 마주한 언니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좋아하던 카페와 자주 먹던 중국음식점이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면 에펠탑이 보이는지를 이야기해줬다. 우리는 내친 김에 함께 여행했던 니스 앞바다도 다녀왔다. 내가 언니에게, 내가 토론토에서 지내던 학교를 보여 줄 때는 무심하더니 왜 이렇게 들떴냐고 묻자, 언니는 내 북미 생활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그러려니 싶다고 했다. 하긴 1년은 길다면 길지만 사실상 짧은 시간이라 토론토에 있었던 작년이 너무도 가깝게만 느껴지니 하는 수 없다.

   오늘은 하루종일 빈둥거리면서(앞으로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올해 안, 아니 내 인생 안에 완성될지 의문인 소설을 썼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설정의 인물이 나와서 고증을 잘 해보겠답시고 미국 생활 브이로그를 검색했는데 웬걸, 올해 영상이 나왔다. 학교 생활을 위해 코로나로 인한 난리통 속에도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 가고 있는 사람의 브이로그였다. 사람으로 북적대던 장소가 텅 비어 버린 모습을 그는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다시 갈 수 없는, 앞으로 갈 수 있을지 희망이 요원한 장소에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해 살아 나가고 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을 살아 왔다. 난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만 가면 그 시절이 열릴 것으로 여겨졌다. 교환학생을 다녀 온 뒤에는 여행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직면한 후의 일렁거림이 꽤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우리 언니가 내 이야기를 듣다가 피곤해진 것도 아마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난 앞으로도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흐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서울에 고여 있지 않고 내가 누빈 적 없는 도시들을 누비면서.

  다시. 난 전세계인이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시절의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여전하게 느껴지는 일들도 있지만, 그 기저에는 불안,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부자유가 깔려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르다. 구글 어스로 내가 존재했던 도시들을 찍어보고, 더 가고 싶은 곳은 스트리트 뷰로 찍어 보면서,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장소들을 생각보다 얼마나 몰랐는지를 새삼 느꼈다. 그리고 그 장소들 혹은 그들이 희망하게 만들었던 새로운 장소로의 여행을 당장 내가 얼마나 그리워 하고 있는지도.

  그리고 그곳엔 사람들이 산다. 고등학교 때였나, 원주에서 온 친구에게 '원주에 사람이 산다는 점이 믿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가 빈축을 산 경험이 있다. 친구는 내가 원주를 시골로 여긴다고 생각해 뭐라고 한 것이었겠지만, 사실 나는 그만큼 내 의식이 고향에 매여 있었고, 따라서 경남이 아닌 지방의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이 생경하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한 미국 유학생이 올해 올린 브이로그를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난 내가 한국 바깥의 세계를 떠나왔다는 이유로, 보스턴의 호스텔 부엌에서 나와 같은 시각 컵라면을 까던 한국인 여행객이나, 포틀랜드에서 내 잔에 와인을 따라 주던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던 아바나의 아침 식당 사장님이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쯤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제각기 바지런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의 부자유나 공허를 느낄까, 나처럼? 

  북미에 있을 때에는 여행지마다 교통카드를 모으곤 했다. 다시금 교통카드를 모으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다시 한국 바깥의 어느 세계로 뛰어 들어갔다는 이야기일 것이며 그곳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세계의 넓음을 다시 한 번 체감하고 있다는 뜻이 될 테다. 나 같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섞여 지내는 것이 오늘날의 본질이었다고 나는 믿기에, 지역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금 안녕을 묻고 싶은 이들의 자아가 다시금 한데 뒤섞일 날을 기다리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소설을 붙잡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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