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시간
제제는 원체 또래보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민한 편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담아두지 못하고 표현하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 유치원 때도 몇 번 친구문제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걱정은 했었지만, 기관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이들이 겪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순간들을 나름대로 잘 넘어갔던 것 같다. 아이가 약간은 내성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 만나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크게 어려워하지 않아서 그동안 별달리 교우관계를 걱정하지는 않았었다. 다양한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리지는 못해도 한 두 명 마음 맞는 친구들과 잘 지내왔기 때문에 호주에서도 잘하리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 들어 딸아이의 감정 상태가 썩 고르지 못했다. 평소보다 짜증도 많이 내고 축 처져 있을 때가 많아서 달래 보기도 하고 마냥 들어주기는 어려워 다그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하굣길에 만난 제제와 잘 지내는 A라는 친구의 엄마가 자기 딸이 받은 쪽지라며 보여주었는데, 누가 봐도 제제가 쓴 편지였다. 영어로 '나는 네가 싫어. 너는 이제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야.'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친구엄마는 쪽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익명으로 쓴 채 다른 친구에게 전달받은 것이라 자신의 아이가 더욱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아이 엄마를 통해 최근에 제제가 오늘 일 외에도 여러 번 다른 친구들과도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왜 저런 쪽지를 건넸을까, 황당한 마음이 앞서는 데다 또 오늘일 말고도 다른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속이 많이 상했지만, 우선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 학교에선 별일 없었어?"
역시나 아이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이는 평소에도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긴 하다. 평소같이 정말 기억이 안 나서인지 아니면 말을 하기 싫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할 문제라고 여겨 마음먹고 이야기를 더 나눠보기로 했다.
"오늘 선생님께 따로 연락을 받았는데, 어떤 내용으로 연락 주셨는지 짚이는 것 없니?"
그제야 제제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평소에 같이 잘 노는 친구와 쉬는 시간에 놀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아 보여달라고 이야기를 하니, 'It's none of your business.'라며 차갑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잘 지내던 친구여서 더 속상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쪽지를 다른 친구에게 부탁해 전달했다는 것이다. 우선, 아이가 속상했던 마음은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쪽지를 쓴다든지 심지어 그 쪽지를 직접 전달한 것도 아니고 다른 친구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임을 알려주었다. 정말 속상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 마음을 이야기하고 그래도 친구가 여전히 똑같이 대한다면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오늘 일이 있기 며칠 전에는 친구 A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놀던 중, 프렙친구들이 놀면 안 되는 구역(제제의 학교는 구역이 나뉘어 있다.)에서 놀고 있길래 제제가 프렙아이들에게 '여기서 놀면 안 돼'라고 훈계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겨서 제제에게 그러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이야기를 하니 제제는 내가 옳은 말을 했는데도 아이들이 다 자신의 편은 들지 않고 자신을 소외시킨다는 느낌을 받아 그 아이들과도 다툰 일이 있었다. 이것 말고도 친구 A의 엄마를 통해 다른 다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해프닝으로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해 보기로 했다.
그 다음날 하굣길에 선생님을 뵙고 눈인사를 나눈 후 선생님께 말을 걸려고 하니 때마침 잘됐다는 제스처로 선생님께서도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최근에 제제 신상이나 환경에 변화가 있었나요?"라고 걱정스레 말을 걸어주셨다. 나는 특별히 그럴만한 일은 없었다고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최근 몇 주 동안 제제가 친구들이랑 여러 번 다툼이 있어서 계속 지켜보다가 오늘은 나와 이야기를 나눠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저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말씀드리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씀드렸다.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다면 제제가 영어가 편해지면서 친구들과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텀 2까지만 해도 아이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전달하긴 어려웠을 터였다. 신기하게도 두 텀을 보내고 나니 영어로 말을 하는 것에 자신감이 붙고 어렵지 않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하는 성미이고, 어떤 무리에서도 자기가 하자는 대로 이끌고 싶어 하는 아이임을 잘 알고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이런 부분을 많이 교정해 주려고 애를 썼었다.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는 어렵고, 때로는 양보도 해주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어렸을 때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기본 성향이 이렇다 보니 텀 3 들어서 이런 문제가 더 불거진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두 텀까지는 아이들의 상황을 지켜보며 주변을 살폈다면, 이제는 말도 편해지고 적응도 되어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하다 생기는 문제들은 아니었을까.
선생님께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도 그런 부분을 생각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래도 처음 문제가 생겼을 때보단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며,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여자 아이들이 대부분 시기별로 한 번씩 겪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곧 텀 3가 끝나고 방학이 다가오니 재충전을 하고 나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 말씀해 주셨다. 혹시라도 텀 4가 시작해도 같은 문제가 생기면 지체 없이 나에게 이야기해 주겠다고 하시며, 아이가 더 어려워할 경우엔 따로 상담프로그램이 있으니 그때 이야기를 다시 나눠보자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바라봐 주시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내가 최근에 너무 아이를 다그치고 혼냈던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 그리고 사회성이 다른 또래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높은 기준을 세워두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를 안타까워하고 조바심을 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곳에서 아이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이고, 훈육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도 오롯이 나뿐이어서 때론 그 몫이 무척 무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게다가 생활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모든 일을 내가 맡아서 하고 있다 보니 나 또한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게 되고, 그런 순간에 아이를 대하다 보면 내 지친 감정까지도 전달되는 경우가 있었다. 아이도 제대로 표현하진 않았을 뿐, 이렇게 타국에서 다른 언어로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이곳에서 기댈 사람이라고는 엄마뿐인데, 엄마가 어른으로서 아이를 더욱 품어주어야겠다는 반성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