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그림자

카미노 데 산티아고 - 메세타

by 알토

부르고스를 지나면 장엄한 메세타가 시작된다. 해발 900m의 분지. 밀밭과 보리밭이 지평선 끝까지 끝도 없이 펼쳐지고, 며칠을 걸어도 길 위에 순례자 말고는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인다. 봄의 메세타는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이 녹색의 물결을 만들어 장관을 이룬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가을. 이미 수확을 끝낸 밀밭은 마치 사막 같은 황무지였다.

레고처럼 보이는 트랙터. 가까이 지나가면 탱크만 하다

걷는 동안 내내 먼지 풀풀 나고, 지루하고 황량했지만 오히려 나에게 쉼이었고, 휴식이었다. 해가 하늘 높이 걸리기 시작하면 한여름처럼 덥고, 그늘을 만들어 줄 나무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알베르게에 일찍 들어가면 빨래하고, 샤워하고, 저녁 먹으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다른 여행자들을 만나 어디서 왔는지, 출발한 지 며칠째인지, 왜 왔는지, 앞으로 남은 길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말을 붙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길을 나선 이유를 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여 아주 천천히 메세타를 혼자 걸었다.


어떤 이들은 생장부터 동행이 있거나, 길에서 우연히 만나 산티아고까지 함께 걷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침이면 혼자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선다. 다시 아침에 시작되었다


혼밥, 혼술이 유행이고 여행도 혼자 다닌다. 동행이 없으니 나만의 이기적인 취향에 따라 여행 일정, 볼거리, 먹거리를 결정한다. 머무는 곳이 좋으면 하루 더 있고, 마음이 바뀌면 여정을 변경해도 된다. 하루 종일 호텔에서 뒹굴어도 눈치 볼 필요 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다. 나도 그렇게 자유를 만끽했다.

오랜 세월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업으로 삼았었고, 월급을 받는 동안 나는 "을"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폭격하듯 쏟아지는 전화, 메일, 카톡, 문자메시지에서 도망치기 위해 핸드폰 유심을 바꿨다. 아내만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고,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울려대던 핸드폰도 고장 난 것처럼 조용했다. 추수를 끝낸 메세타의 텅 빈 밀밭과 태양, 그리고 나뿐이었다.

시커멓게 말라, 마치 불에 그을린 것 같은 해바라기를 보며 가족들이 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리움이지 가슴을 관통하는 외로움은 아니었다.

San Zoilo 수도원

이제 중년의 고개를 넘는 또래들은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고 있었다.그들의 짐을 내가 덜어 줄 수도, 그들이 나의 삶을 나눠 가질 수도 없었다. 조용히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는 지나간 젊음에 대한 추억, 자식들의 학업문제, 사교육비에 대한 부담을 성토하고, 오르는 집값, 건강, 노후에 대한 걱정을 서로 주고받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김광규 님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에는 4.19가 나던 해 대학을 다닌 동창들이 18년 만에 만나 젊은 날을 추억하고, 현실을 논하다가, 달력 하나씩을 옆에 끼고 헤어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시의 배경은 1970년대 말. 40년이라는 시간의 벽이 있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나의 아버지가 40년 전에 느꼈을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겠구나 생각하면 쓸쓸해졌다.

모임이나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SNS로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상투적인 문자를 남발했지만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는 친구, 동창, 사회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SNS를 통해 소통하고 연결된다. 그들이 오늘 무슨 일을 했고, 무엇을 먹었고, 지난 주말에 어디를 여행하고, 어떤 옷을 샀는지 알수 있다. 일부러 약속 잡고, 밥 먹고, 차 마시면서 시간과 돈을 쓰는 것도 아니니 효율적이다. 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연락을 주고받지만 왜 마음은 허전할까?

부르고스 대성당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하리의 창이라는 것이 있다. 사각형을 4등분 해서 안쪽에 벽을 쌓는다. 이 벽은 반대편을 볼 수도 없고, 서로 통하지도 않는 벽이다. 이 사각형의 방을 타인은 앞에서 바라보고, 자신은 측면에서 본다고 가정하면 인간에게 4가지 자아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나도 볼 수 있고 타인에게도 보이는 자아이다.

스스로 활발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를 외향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고 관점이 같다면 이 영역에 속한다

두 번째는 나는 볼 수 있지만 타인에게는 안 보이는 자아이다. 내면 깊은 곳에 트라우마나 상처가 있지만 남들에게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나만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타인에게는 보이지만 나에게는 안 보이는 자아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모른다.

마지막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자아이다. 깊은 곳에 숨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아. 멀쩡한 사람이 술만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하고 다음날 기억 못 한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 같다.

빈 종이에 두 개의 선을 그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질문은 많이 해봤다. 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저 직장에서의 직책, 한가정의 남편과 아빠, 장남으로 나를 규정하고 그 의무와 책임이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혼자 걸으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나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잠시나마 직장인, 남편, 아빠, 아들로서의 책임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길에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동안 내가 꿈꾸었던 자아상, 가치관이 내가 정말 원했던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타인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근사한 삶으로 포장하려는 불순한 욕망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이 순례길도 그 욕망의 산물인지 모른다. 다들 시간과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살고 있다. 큰 결심 없이는 오기 힘든 이곳. 남과 다른 색깔로 나를 덧칠하려는 속된 마음이 내 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서쪽을 향해 걷다 보니 오후가 되면 내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가 한없이 길어진다. 셀카를 찍지 않는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

내가 서면 그도 서고, 내가 가면 그도 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내 그림자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보곤 했다.

메세타에 서서 “너는 누구니?” 하고 그림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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