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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Sep 20. 2024

영화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 살아봤자 고통일뿐.

알래스카 배로우에서 한달 살기

 1987년 셀마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한국엔 상륙하지 않고 대한해협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흉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물길에 마구 휩쓸려가며, 뉴스가 오보였다는 기사가 났다. 셀마는 크기가 어마어마한, 초대형 태풍이었다.

아빠가 속초 해수욕장으로 떠났다는 걸,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거길 왜 갔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슈퍼 앞 큰 나무가 댕강 부러져 있는 걸, 본 엄마는 급기야 가방을 챙긴 것이었다.

엄마는 내게 일찍도 물어본다며 화를 냈다. 그리곤 운동화를 제대로 신지도 않은 채 부랴부랴 현관을 나섰다.


일요일이었고, 티비에서는 셀마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이 방송국마다 속보로 뜨고 있었다. 거대 바람이 단체로 한반도를 감싸고, 우퍼를 장착한 듯 웅웅 거리다가 휘몰아치기를 반복했다. 자다 깬 언니가 말했다.

"파라솔 장사하러 갔잖아."

지구 멸망의 날처럼 하늘이 까맣게 변하면서, 마당 콘크리트 바닥을 드릴로 뚫는 듯한 기세의 비가 하루 종일 쏟아졌다.



그리고 영화 속, 알래스카 배로우.

일 년의 30일, 해가 뜨지 않는 지구 최북단.

그곳에 이방인들이 방문한다. 이름하여 흡혈귀 혹은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새부리 같은 긴 손톱, 확장된 검은 동공, 어류를 닮은 기형적인 얼굴, 탁한 괴성. 이처럼 그들의 음흉한 비주얼도 선뜩했지만 그보다, 난 배로우란 동네가 무척 특이했다.


세상의 끝이라는 지역성이 있지만 한 달 동안 해가 뜨지 않 폭설에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하며, 반면 마을 전체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산타마을 같이 고요하고 판타지스럽다. 은은한 불빛마저 성탄절 가랜드처럼 따뜻하지만, 뭔가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트릭 같기도 하다.   

흑백 필름 같기도 한, 고립되고 잊힌 이 모델하우스 미니어처 같은 마을은 전설 속 아틀란티스처럼 누가 몰래 숨겨놓은 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나지막한 지붕에 쌓인 눈, 어딜 가나 눈밭이고, 너무 추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한 달 동안 해가 뜨지도 않는다니. 그러니 뱀파이어들이 찾아들 수밖에.


뿐더러 하늘에서 롱테이크로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이곳은 뱀파이어들뿐만 아니면, 상처받은 인간들이라면, 한동안 고립돼서 딱 살기 좋은 마을 아닌가.

뱀파이어 아니라, 지구에 흝어져 사는 길 잃은 고양이나 나그네들은 한 번쯤 걸어 들어가고 싶은 곳, 그런 강렬한 끌림이 이곳 배로우엔 있다.


배로우에는 500명이 살고 있고, 그중 152명만 이곳에 남는다.

해가 지기 하루 전날, 낯선 남자가 배로우에 찾아든다.

“그들이 오고 있다”며 위협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리는 남자.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매우 단순하다.

배로우에 뱀파이어 무리를 데리고 입성한 검정 슈트를 입은 뱀파이어 보스. 그 슈트맨과 일당은 배로우에 남은 사람들을 다 흡혈하고 괴멸할  요량으로 이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들은 배로우 이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 남은 듯 보인다. 뱀파이어와 인간들 간의 전면전. 그런데 그 인간들이란 게 오합지졸이다. 몇몇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을 필두로, 계획과 행동이 수반되고 그 과정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기분이 들며, 뱀파이어들의 기습공격에 심장이 떨어질 듯 괴괴하고 소름 돋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괴성을 지르거나, 조용히 지붕 위에 올라서서 자신들이 파괴한 배로우를 내려다보는 뱀파이어들에게서

빔밴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인공 천사 다미엘이 주저 없이 떠올랐다.


베를린 광장 마천루에서 날개 달린 천사 다미엘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첫 장면은, 배로우를 닮은 듯 흑백이다.


천사 다미엘은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에게로 내려간다. 그리곤 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나서 인간이 되길 원한다. 그건 이타적인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난 영원보다 내무게와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지금지금 바로 지금 난 영원이란 말이 싫어


이처럼, '지금' 현재를 당장 살고 싶다는 천사양반.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로 넘어와서,

이 영화 속 슈트맨(뱀파이어 대장)의 여친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자외선램프에 타 죽어갈 때,

살아남아봤자 고통이야, 라고 말하는 남친 뱀파이어의 시니컬한 태도를 보라.


또 아내와 딸을 사고로 잃은 발전소 직원이 감염된 직후에 보안관 에에게  

영원히 사는 건 고문이야. 에벤

제발 나를 죽여줘!

이런 절규하며.



천사든 뱀파이어든 인간이든, 영원히 사는 건 고통이라고 말한다.

접점이 없던 사람 혹은 사람 아닌 것들이 이런 허무함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다니. 정교한 세계가 아닌가.



여하튼 과 스텔라의 차위에 올라타 천장을 두 주먹으로 힘껏 두드리는 까만 뱀파이어의 습격씬과, 이들과 함께 떠돈 파란 리본과 원피스를 입은 꼬마 뱀파이어의 느닷없는 등장, 조용한 존 부부의 저녁 식탁에 유리창을 깨고 텀블링해 들어온 뱀파이어의 순발력. 크리스마스 밤을 즐기려고 모인 동료 셋 중 하나를 잽싸기 끌고 들어갈 때 울리는 사운드트랙과 번개 같은 동작들. 이 모두가 합이 잘 맞고, 대단히 무섭다.      


다락에 숨고, 미끼를 던진 뱀파이어들의 계략을 알아채고, 평범한 빌런이 등장 엄한 사람이 죽고, 오타쿠였던 남자가 포클레인으로 자폭하며, 영웅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영화는 쫓고 쫓기는데


이 영화가 기타 다른 뱀파이어나 좀비물에 비해 탁월한 건, 카메라 구도와 배로우라는 지역이 주는 미학적인 효과 때문이다.

또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은 좀비들처럼 막돼먹은 습성을 지녔지만 어딘가 각 잡힌 용병의 느낌이 난다. 무리 지어 다니는데, 일사불란하고 습격할 때 그 신속함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며 흡혈하는 방법이 잔인무도해서 그렇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생존본능대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인류가  더 잘먹고살기 위해 벌이는, 매일 사회면에 실리는 극악한 행위들 역시 정신승리로 무장한 생존본능 아니던가. 흡혈하는 뱀파이어들의 단순무지한 본능에 비하면 고차원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인간들에겐 회복탄력성이란 무기가 있으니, 뱀파이어 최고참이 오더라도 전투력 만렙일 터.  





  

배로우는 실제 존재하는 지역이다.

나는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를 공히 B급 공포영화의 숨겨진 보석이라 부르고 싶다.  분위기로 단순한 서사를 압살 해버리는 영화.   

무심코 봤다가 빠져드는 건 물론, 하늘에서 롱테이크로 찍는 씬들 그위로. 총소리, 비명소리가 난무하는데 노이즈 캔슬링된 비명소리가 파도타기처럼 나에게만 들리는 묘한 공포를 경험할 수 있다.

뱀파이어피를 수혈해 가면서까지 스스로 뱀파이어가 된 채 스텔라를 지켜낸 에.

마지막 장면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에벤이 스텔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소멸되는 장면은 박찬욱감독이 '박쥐'에서 오마주 한 듯하다.


소로우의 월든 호수를 만났을 때처럼, 난 이 배로우란 동네가 아주 맘에 들었다.

그리고 아빠도 끝까지 살아남아, 나와 함께 이 영화를 봤더라면, 와 저 동네 콱 박혀 살기 제격인걸! 하며 가래 끓는 목소리로 껄껄 거렸겠지.



그렇게 엄마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강원도 속초로 떠났다.

나중에 듣기로는 셀마가 그처럼 큰 태풍인 것을 정부도 모르고 기상청도 몰랐으니, 해수욕장엔 아빠의 파라솔 뿐 아니라 여타 다른 장사를 하러 몰려든 사람들 모두 허탕을 치고, 병만 얻어 뿔뿔이 흝어졌다고 했다.  아빠는 할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비상금마저 셀마에게 뜯긴 채, 수족을 잃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세울 거 없이 자존심만 강했던 아빠는 혼잣말로 '강원도에 콱 처박혀서 살고 싶다'는 말을 밥 먹고 트림하는 만큼이나 자주 하는 사람이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고 바다는 더군다나 티로만 봤던 차에 해수욕장에

파라솔을 팔러 간 아빠라니. 


엄마가 굽이굽이 고개를 넘고 넘어 속초에 떨어졌을 땐,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비바람 때문에 연착되는 버스를 겨우 집어 타고, 버스에서 노란 위액까지 다 토하며 간 길이었다. 그땐 터널이 없어 강원도까지 가는 길이 대단히 멀고 험했다.


관리소에 아빠의 이름을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그 사람 죽었을 거예요"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고 했다.



이 태풍 속에서, 바닷가 앞 텐트에 꼼짝 않고 있었다는 아빠.

 그들은 아빠를 몇 번이나 대피시키려 했는데, 쌍욕을 퍼붓고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둬"라고 하며 열심히 팔다리를 버둥거렸다고 한다.

 

있는 돈을 다 까먹고, 알콜릭 중기쯤 들어선 아빠는 마지막 남은 돈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속초해수욕장에 뿌려버린 셈이고, 내 돈을 물어내라며 아침이면 물에 젖은 뱀파이어처럼  나타나 관리소책상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고 밤이면 텐트에서 늑대와 여우의 중간보이스쯤 되는 허스키한 괴성을 질러댄다며 엄마를 딱하게 바라봤다고.

그런데 요 며칠 관리소에 나타나지 않아 두번 들여다봤노라 전했다.


그날 엄마는 그 어마무시한 바람을 뚫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휘 감느라 앞이 하나도 안 보였는데 파란 비닐하우스 같은 게 보여 그것만 따라갔노라 했다.


텐트는 모레와 미역, 해캄, 짚신벌레 이런 것들로 뒤엉켜 있었고,

그 안에는 빤스만 입은 아빠가 만세를 하며 숨도 안 쉰 채 누워 있었다고 했다.

"처음엔 죽었구나 딱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숨을 쉬더라고."

엄마는 그 말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당신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파라솔을 한 자루도 팔지 못했지만 살아서는 돌아왔다. 까만 얼굴에 유난히 하얀 이빨은 뙤약볕에 한참을 내몰린, 젊은시절 당신이 참전했던 베트남의 게릴라군 내지는 흡혈한지 오래된 뱀파이어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금의환향까진 아니어도, 주인집 내외는 셀마에 파라솔과 함께 날아가지 않은 것 천만다행이라며 아빠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아빠는 한동안 내게 후일담을 전했는데 그건

집채만 한 파도에 관한 거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사방에서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애기 울음소리처럼 들려와서 귀를 꼭 막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말할 때, 아빠의 하얀 이빨이 둥둥떠다니며 내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은 겨울이 지나도록 그대로였고, 애기 귀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살살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내게 겁을 주려고 말을 지어내는 듯했다.


"아빠 안 무서웠어?"

"죽는 게 뭐가 무섭냐."

"그럼 뭐가 무서운데?"


"오래 사는 게 무섭지."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요원처럼

아빠는 내게 그렇게 말했.



알래스카 배로우란 도시에 출몰한 뱀파이어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 포식자인지를 따지기보다는,


이런 동네에서 아빠랑 한두 달쯤 살면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가만히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상상을 했다.



아버진 셀마엔 살아돌아왔지만 허수아비처럼 살다가, 일찍 죽었다.

누군가 증강현실 속 아버지를 만들어준다면 나는 저 고요한 산타마을 같은 배로우에서 아버지와 만나, 고즈넉이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진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

아빠와의 추억이라곤 당신이 들려줬던 해묵은 베트남전쟁이야기와 집채만 한 파도에 얽힌 과장된 귀신이야기밖에는 없으므로.



오래 사는 게 무서웠던 내 아버지의 그때 나이는 겨우 마흔한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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