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꼴 Sep 06. 2024

영화 <디스트릭트 9>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기

변신이야기

나는 변신이야기를 좋아한다.  

투명인간이 된 할로우맨의 세바스챤, 순간이동기(타임머신)를 발명하려다 파리가 된 천재과학자 브런들.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나 뱀파이어가 된 평범하거나 비범한 이웃들. 그리스 신화 속 올림푸스 신들의 변덕과 시기심 때문에, 갖은 미물로 변신하는 이름도 복잡한 인간과 신들의 이야기. 엑스맨의 돌연변이들. 앤맨과 스파이더. 내가 좋아하는 헐크. 카프카의 딱정벌레 그레고리잠자. 

그리고 이 영화속 비스커의 선득한 변신이야기까지.


끝도 없는 이들의 변신은 저주거나 일부는 축복이고, 관객이나 독자들에겐 더더 변해서 내가 이루지 못한 목표에까지 도달했으면 하는 대리만족의 원형이 하다.


그런데 이들은 변신 후 사회와 그 구성원들로부터 팽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그 비밀을 숨기고, 발각됐을 땐, 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막가파식 살인을 일삼거나, 철저히 자신을 숨긴다.     


변신(카프카)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마리의 딱정벌레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가족을 반평생 먹여 살리는 샐러리맨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벌레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에게, 오늘밤 당장 꺼져줬음 하는 존재가 된다.

처음엔 눈물을 한두 방울 찍어 내던 가족들도, 내게 유익이 안되니, 쥐똥만 한 인내심도 이젠 안녕.


누가 소문이라도 낸다면, 그래서 우리의 안락한 일상이 깨어진다면 저런 벌레(내 자식) 열 마리쯤은 파리채로 쳐 잡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해, 작은 방에 아들을 가두고, 각자 살길을 찾는다.


그가 죽은 뒤, 유유히 산책을 떠나는 가족들의 모습은 기괴하지만, ......일면 나의 모습이다.


얼마 전, 요양병원을 오가며 엄마의 투정과 막말시전을 한 달 내내 겪은 후, 나는 내 편안한 일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나 남은 자식인 나 혼자, 이 거친 시간들을 다시 견뎌야 한다는 게 진절머리가 났다. 애초에 뽑기 운이 없어 이런 '가족'을 만난 것인가. 왜 가족은 선택할 수 없는가. 나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경주마처럼 살아왔는데 내 인생을 왜 이토록 초토화시키는가. 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수는 없는가.



          



1982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디스트릭트 9.

석 달 동안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비행접시. 그곳엔 리더 없는 외계인들이 버려진 채 살고 있었고 이들을 남아공은 인류애를 의식해 20년 동안 디스트릭트9이란 거주지를 지정해 살게 해 준다.


이곳에서는 프런은 프런끼리, 인간은 인간끼리 구역을 나눠 잘들 살아간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흐르고, 인간들에겐 우리의 모든 불행은 프런들 때문이란 혐오가 싹트고, 분노는 그들에게 투사된다.     

유유상종, 끼리끼리란 말은 혐오스럽지만, 정답인 경우가 흔하다.


180만프런들을 외곽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작전 비커스를 필두로 진압이 시작되고,

디스트릭트9에 사는 고양이깡통을 먹고사는 프런들을 매너 있게 설득시키는 비커스와 대비되는 무자비한 요원들과 나이지리아 갱단. 그들의  무기밀매과정. 외계인무기를 획득하기 위한 사투와 맞물려 비커스, 외계물질에 노출되고, 이후 드러나는 프런들의 생체실험실, 본부에서 버려진 채  해부될 위기에 놓인 비커스 프런편에 서게 되는 숨가 진행. 이 모두가 구멍 없이 탄한 스토리라인을 이룬다.



다들 자신들만의 리그가 있다. 그안에선 또 취미, 지역, 아파트, 나이, 학교, 병명, 키, mbti, 기타 등등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

그 리그에 통분모가 없는 자는 불청객이다. 다수의 시선이 불청객을 향하고 작은 실수 하나가 불씨가 돼,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일은 흔하다. 그래서 마지막엔 무리에서, 손털고 나오는 그런 일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디스트릭트9에서도 짓 인류애는 바닥이 나고 20년 동안이나 외계인들을 참아왔다고 말하는 시민들은 그들을 '프런'이라부르며 꺼지라 소리친다. 이렇게 디스트릭드9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프런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라는 뜻.)

대상이 정해졌으니, 이제 단일대오로 저것들 소탕하면, 린 다시 낙원에서 살게될거라는 안일한 희망을 품는 사람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공유한 구성원들은 너무나도 쉽게 단일대오가 가능하다. 비슷한 질량의 죄책감을 짊어졌으므로 구심점을 지닌다. 긍정적인 말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지 못다. 약점을 잡아야 설탕에 모여드는 개미군단처럼, 원심력이 생겨난다.


외계인 유동체에 노출된 비커스가 변해가는 모습은 몹시 섬뜩하다. 데이빗크로넨버그 감독의 '플라이'와 진행과정이 매우 흡사. 잘록한 허리, 더듬이 견갑류의 외피. 툭 불거져 노랗게 변한 흰자위. 구부러진 어깨.

그럼에도 난 감독이 만든 프런이 아주 맘에 든다. 그들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더듬이와, 사격의 목표물이 돼 끌려 나올 때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하는 동작까지. 비커스가 프런으로 전향하는 과정, 그 디테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1982년 요하네스 상공에 석 달간 떠있는 비행물체에 진입해, 아사직전인 외계인들의 거주지역이 20년간이나 지상에 현존했다는 사실부터가 흥미로운 진행이다. 외계인들은 인간들에게 외경시되는 소재로 등장하는일이 흔했고,  키가 크고 어류와 파충류의 중간쯤 되는 미끈미끈한 피부와 동공을 지, 우주선에 석 달이나 웅크리고 앉아 굶주림에 시달릴 법한 족속으로 묘사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전개가 특이하고 대담하다는 것이다.     


물론 남아공의 아라파트헤이트가 198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고, 소수의 백인들이 남아공에서 벌였던 일들은 영화 속 프런들이 받는 대접보다 더 교묘하고 악랄했을 수도 있다.

외계인을 지배하는 인간들이란 설정과,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백인들의 횡포를 은 정치풍자의 성격을 지닌 특별한 영화 디스트릭트9.


대부분의 프런들은 사령선을 잊었을 테지만, 크리스토퍼는 사령선만 있으면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20년 동안 유동체에 사령선을 움직일 물질을 모아 왔다.


또 비커스가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리얼스틸의 고철로봇 아톰처럼 MNU 대원들에 맞서는 장면은 뭉클하다. 이제 비커스는 경계에 서 있지 않다. 그는 프런이다. 그의 전투력은 갱스터들이 프런을 잡아먹어서라도 프런의 힘을 갖고 싶어 했던 그 욕망의 증거다. 크리스토퍼는 3년 후에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긴 채 비행선을 띄운다.      


시간이 흘러 디스트릭트 10으로 이주한 250만 프런들 사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아내에게 줄 꽃을 접는 비커스는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크리스토퍼가 치료제를 들고 3년 후 돌아와, 비커스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 줄지는 의문이지만, 그는 잘 살고 있다.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인간으로 남고 싶어 했던 비커스가, 시커멓고 긴 촉수로 장미꽃을 접고 있는 장면은 신비로웠다. 그가 반인반수로 살아남느니 프런으로 살아가게 돼 천만다행이다.      


남과 다른 신체구조나 정체성이나 가정환경을 갖는다는 것은, 숨겨야 할 잘못이 아니지만 드러나는 순간, 귀찮은 일들이 마구 생긴다. 그래서 그냥 나와 비슷한 더듬이를 지녔거나, 습성이 비슷한 부류에서 살아가는 게 몸과 마음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더러 생각하곤 했다.     

 


다른 구획에서 살아간다는 건, 내 닳은 구두의 뒷굽과 유행 지난 코트의 보풀을 누군가 훔쳐보지는 않을지, 쿠폰을 모아 오픈런하는 일상을 쩨쩨하게 보지는 않을지, 재미없는 성격을 뒷담 하지는 않을지, 하는 초조함과 부끄러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비커스가 다리를 쭉 펴고 잠들 수 있는, 같은 프런들의 둥지인 디스트릭트 10에서 살게 돼,  안심이다.


디스트릭트9을 공포영화의 범주에 넣은 것은,  프런들의 절단된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산산이 해체되는 프런들 시커먼 핏물에


빨간색만 덧씌웠으면 화면전체가 이닝의 파도씬보다 더 장엄했을 터이고, 프런들 입장에서 봤을 땐 이보다 더한 호러가 없을 거라 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영화는 무척 잔인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면 엄마는 다행히, 퇴원을 해서 시골로 내려갔다.


요양병원에 입소하기 전, 엄마는 최근 목숨을 건 큰 수술을 받았고 후유증으로 몇 주동안 극심한 섬망에 빠졌다.

섬망에 시달릴 때, 그녀의 수십 년 묵은 악몽은, 아들이 어릴 적 숨겨놨던 구몬학습지처럼 꾸역꾸역 현실로 쏟아져 나왔다. 밤새 허우적거리고 벽을 치고 괴성을 질렀을 엄마.

자식을 둘이나 잃고 살아남은 엄마의 악몽은, 그 뿌리가 얼마나 검질겼을 것인가.


엄마는 꿈속에서 매일 동물이나 사물로 변하는 아이(아들)가 있고 그아이를 쫓아다닌다는 꿈을 꾼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병실의 환자들과 간병인은 엄마를 무척 불편해했다. 반년 가까이 가수면 상태 옆침대 노인 다리움찔거릴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한족출신 간병인은 내가 면회를 가면 파파고에 "잠꼬대가 심해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옆방에서도 항의를 해요"라는 글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모두의 심정이 이해됐다.


아침이면, 주먹 쥔 손에 멍이 들고, 목이 쉬어있곤 했던 엄마는, 주눅 든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냥 개 한 마리랑, 티비만 있으면 돼.

시골로 가고 싶어."

팔순 노인에게서 절박한 열다섯 살 소녀의 음색이 났다.


나는 퇴원수속을 하며 엄마에게 스타벅스 커피를 한 잔 사다 주었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 마. 엄마에겐 내가 남았잖아."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