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꼴 Aug 30. 2024

영화 <기담> 불행은 예의가 없지

나무를 심거나 윗몸일으키기를 하거나

코로나가 기승이었다.

재개봉하는 '기담'을 보기 전, 나는 친구와 용산 아이파크몰 투썸에서 만나, 팥빙수를 급히 우적우적 먹고 일어났다.

인류의 종말이 도래한 듯, 바이러스는 전지구를 들쑤셔놓고 있었고, 마스크를 벗고 뭔가를 마시고 먹는 행위 자체에 죄책감이 드는 초여름이었다.

 

극장 안에는 마스크를 쓴 관객들이 뜨문뜨문 거리를 두고 앉아 어디서 기침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돌아보거나, 초조한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마스크를 더 단단히 여미었다. 그 사이로, 기담의 프롤로그 흑백 필름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기담의 사전적 의미 :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딱 그렇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바이러스의 창궐, 그 상황과도 맥이 통한다. 이또한 이상야릇한 현상 아닌가.


1942년 2월 경성, 안생병원,

사랑에 홀린 자, 여기 모이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안생병원’에서 헤매는, 공포영화의 기존 공식을 내려놓고 면밀히 봐야 하는 실타래 같은 이야기들이다.     

배경은 일제강점기. 3가지 에피소드의 옴니버스 형식이다.

세트가 기묘하게 아름답다.

붉은 벽돌과 목조 양식이 섞인 고풍스러운 안생병원의 시체실과, 해부실, 병실을 오가며 이야기는 돌고 돈다.

물에 빠져 죽은 여고생과 정남의 영혼결혼식.

실어증을 앓는 아이와, 엄마귀신의 사연.

천재 의사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그리고 이 세 개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하나로 만난다.     

일제 강점기 참혹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이런 고혹적인 공포를 만들어내다니. 아오이의 시체가 얼음 아래에서 파랗게 떠오를 때, 그 위로 떨어지는 빨간 꽃잎 한 장.

해부실의 노란 백열등이나 시체 안치실의 삐걱거리며 열리는 옅은 옹이 결이 살아있는 안치함 문짝 하며 은색 손잡이, 소품 하나하나가 인물들의 사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인영과 동원의 그림자놀이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과하지 않은데 애잔하고, 불시에 선득해진다. 짜고 치는 느낌이 없고, 서서히 쌓가는 서늘함이  뻔하지 않아 묵직하다.   


자신도 모르는 영혼결혼식을 한 정남에겐 평생 아오이의 영혼이 따라다녔고, 교통사고 후 혼자 살아남은 아사코에게 출몰하는 엄마 귀신의 소름 끼치는 중얼거림이 들린다. 그 말인즉 ‘괜찮아, 아사코 잘못이 아니야’란 의미였다는 걸, 또 의사 인영이 남편의 복수를 하고 그를 지켜내기 위해 해리성 장애 속에 숨어버리는 설정 모두 반전의 반전이다.


불 꺼진 병원 복도. 수인과 인영, 그리고 병원의 다른 인물들이 서로의 촛불을 나누며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병원 문밖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돌아서는 정남의 쓸쓸하고 복잡한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기담'은 음향이 걸출하다.

음울한 시대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불행이란 ‘맨홀’ 속에서 버둥거리는 인물들의 절망이 아날로그 한 음과 단조로운 피아노 음으로 되살아났다.

미장센을 놓고 보면 별 다섯 개를 꽉채워 주고싶다. 서서히 조여 오는 심리적 압박감뿐만 아니라 장면마다 뚝 떼어놓고 봐도 각각의 의미가 있다. 꼭 기담을 뛰어넘는, 한국형 호러가 나오길.    



영화는 영화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이 밀려든다.

그런데 과연, 느닷없이 닥친 불행이란 게 있을까, 하는.

타인에게 닥친 불행은 어딘가에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며, 내게 닥친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생각하는 오류.

불행은 행간 없이, 그냥 아무 때나 예의 없이 밀고 들어오는 채권추심원이란 걸 모두 알고 있지만, 시치미 떼면서 살아갈 뿐 아닌가.     


이 낯설고 무서운 영화는 지독히도 불운했던 한 때를 상기시켰다. 그날의 공기, 바람, 습도, 냄새까지 떠올라 습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고, 빠짐없이 허청거리며 걸었던 거리였고, 허우룩했던 맘이 돌고 돌았던 그때, 그 자리.


나이를 먹어, 부모를 여의고, 형제가 떠나건 순리라지만 누구에게 상흔을 남긴다. 내 피붙이인데 얼어 죽을 호상이 어딨 는가.




내 동생은 열다섯 살에 우리를 떠났다.

티비를 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사고들이 타임라인에 쏟아지지만, 대개는 디저트를 먹거나 누워 핸드폰을 보며 타자의 사건들을 접한다. 전적으로 남의 일이다. 게다가 한편 나의 불행이 유예된 데에 대한 안도감 내지는 누군가 그 불행을 전면으로 막아준 것에 대한 감사함이 들기도.  


그 와중에 당사자들은 이 날벼락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며 약을 털어먹거나 술에 취하거나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폭하며, 그냥 버려진다.

   

‘기담’에서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남편을 잃은 이들은, 각기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살아남기로 작정한다. 정면승부란 가당치도 않다. 미신을 동원하고 실어증 뒤로 숨어버리고 다중인격이 돼버린 이들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이고 억울한 죽음의 변방에 선 이들의 방어기제다.


우리도 오랜 세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고, 한때 모두가 알콜릭이 돼, 사회에 폐를 끼치는 시민으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죽어라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폐허에 적당한 바람과 햇빛이 들어 채소가 자라고 새들이 찾아왔다.     



쟝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에서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르는 평생 나무를 심느라,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두 번의 전쟁통에 나무들이 불타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냥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조용히 계속 너도밤나무를 심는다.




그는 쉰둘에 아내와 아이를 잃었다.     


나는 그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다면,

나무를 심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린 모든 것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정남의 마지막 씬, 대사 )   


나도 그의 말처럼, 모든 것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한때 그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