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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Aug 16. 2024

샤이닝

공감이 필요해

나는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취향은 퍽 오래된 일이다.

질녘 놀이터, 아이들을 모아 사람이 죽으면 치아가 어디부터 빠지는지 그 빠진 치아와 머리털은 어떻게 되는지, 썩은 냄새와 눈구멍에서 나오는 구더기들은 시체를 어떻게 해체하고 먹어치우는지에 관한 서사를 증명하다보면, 뉘엿 해가졌다. 아홉 살 아이에게 나오기 어려울법한 그런 얘기들을 난 대체 어디서 가져왔던 걸까. 반은 뻥이고 반은 상상인 그 취향은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허구에 이리도 집착하는지, 아이들에게 전염되는 공포를 키득거리고 즐겼는지, 그 가학적 취향은 왜 생겨났는지 '샤이닝'을 보면서 기억이 났다.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 두려움의 시초는 다락방이다.

나는 우리집 다락방엔 반드시 귀신이 살고, 그것들은 내가 잠들면 팔다리를 꺾으며 내려와 엄마 아빠의 흉내를 내고 냉장고를 뒤져먹고, 내 얼굴을 쓰윽 만지고 사라질 거라는 그런 상상을 날마다 했다. 실눈을 뜨고 천장과 벽에 들러붙은 하얗거나 까만 옷을 입은 귀신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혹은 둥둥 떠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 나는 잠이 부족해 학교에서도 매일 졸기 일쑤였다. 주일학교에서 암송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세트로 여러번 암송하고, 바람소리가 나도록 허공에 십자가를 여러 번 긋고, 마지막엔 엄마의 귓불을 잡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나서야 얕은 잠이 찾아왔다. 엑스칼리버라도 있었더라면 마구 휘둘렀을 불면의 시간들.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늘어진 귓불만큼 내 공포는 서서히 자라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공포체험을 아이들에게 떠벌이며 묘한 즐거움을 갖게 됐고, 드디어 귀신들을 쥐락펴락할 힘을 얻게 됐다.

아이들이 내 말과 표정에 따라 움찔거리고 놀랄 때마다, 청량한 엔돌핀이 돌았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상상한 귀신들은 점점 진화했고 더 많이 피와 살이 튀었으며, 아이들의 잠자리를 들쑤셔놨다.


어른이 되고나서는 좀더 주체적으로 그 공포의 감정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우물에서 사다코는 현실로 기어나와 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했는지, 식스센스 맬컴의 눈빛은 왜그리 쓸쓸했는지, 알포인트 군인들은 왜 갈대밭에서 한 명씩 사라졌는지, 장화홍련은 21세기에 왜 다시 리메이크되어 목과 팔이 꺾인 엄마귀신을 기어코 만들어냈는지, 기담의 엄마귀신은 어쩌다 저런 그로데스크한 모습으로 딸의 꿈에 자꾸 출몰하는지, 원더풀라이프의 림보역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중립기어 박은 영혼들은 왜저러거 우물쭈물하는지까지.

기승전결이 있는 귀신들의 칭얼거림에 귀기울이게 됐고, 이건 우리 모두의 아주 평범하고 억울한 이야기란 걸 다시한번 알게 됐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알리바이가 되거나 변호인이 되어 이야기에 스며들었다.


'샤이닝'은 20대에 한번, 50이 돼 다시 한번 보게 된 특이한 영화다.


20대의 샤이닝을 봤던 시절의 나는, 가난한 스물두 살의 가장이었다.

눈을 감고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서 양말을 신고, 퍽퍽한 달걀 한 개를 입에 물고 현관문을 등짝으로 열고 나가면, 금세 밤이 들이닥쳤다. 그리곤 밤을 등지고 들어와선 양말을 신은 채 잠들었다. 내 인생의 한때가 뭉텅뭉텅 사라진 그때.

가물가물한 꿈이 있었지만 꿈을 이뤄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패잔병처럼 바라보며 돈을 벌던 때, 나는 샤이닝을 봤다. 심드렁했고, 뿐더러 그게 공포영화인지도 몰랐다.


이제부터는 두 번 째 본 샤이닝.

전인류가 삼년 간 혹독히 치던 전염병의 공포가 사라진, 현재.

서울 한 복판은 여전히 어떤 바이러스에 잠식당한 듯보인다. 눈에 핏발 선 사람들이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빗금쳐 가며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너무 날이 서 있어 같은 언어를 쓰지만 대체 말이 통하지 않고, 그 사이엔 커다란 싱크홀이 나 있는 모양새랄까. 도시엔 방향감각을 잃은 좀비들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아무렇게나 아무데로나 걸어가다 모르고 어깨를 치고 지나는 동료좀비에게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목덜미를 물어뜯는 그런 포악한, 세기말의 풍경이랄까.


이런 시대에 '샤이닝'은 내게 공감과 광기라는 화두를 던져줬다.


주인공과 텅빈 오버룩 호텔, 대니와 토니. 폭설. 게다가 이 호텔은 예전 인디언들의 묘지 위에 세워졌다. 227호실의 비밀. 잭은 알콜릭이고 대니는 쌍둥이 유령과 가족의 미래를 샤이닝을 통해 보게 되고, 작은 아내와 아들을 토막내는 꿈을 꾼다.

레드럼(Redum), 머더(Muder).

곳에 배치된 으스스한 코드들도 좋지만, 잭의 노이로제가 점점 극단을 향해 치닫는 과정이 압권이다. 희번덕한 눈빛과 허공에서 아무렇게나 휘적이는 손과 발을 보라. 잭 니콜슨은 진짜 미쳤다. 미친놈을 이처럼 연기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잭의 본성이 깨어나는 과정은 이 호텔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과 맥을 같이한다.


미로에서 잭이 대니를 쫓은 장면은 그가 이곳 오버룩에서 세상으로 나가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다. 마지막 장면 오버룩을 거쳐간 사람들의 사진이 클로즈업돼 비출 때 그곳에서 웃고 있는 흑백 사진 속 잭은 순환의 고리에 걸려든 인간이면서 인간 아닌, 가여운 인생임에 분명하고.


공포영화를 보는 최고의 재미는 죽은 줄 알았던 인물이 다시 살아날 때다. 나는 꼭 잭이 다시 살아나길, 그래서 폭설 내리는 오버룩에서 이곳을 떠도는 귀신들의 이야기를 완성해주길 쓰이지 않는 소설과 맞닥뜨렸을 때의 고독과 불안과 광기에 대해 말해주길,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이 끝나길 바랐다.


세상 모든 귀신 이야기는 공감에 관한 서사다.

억울한 인디언들과 아빠에게 죽임당한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잭의 가족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귀신들은 어쩌면 폭설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고립된 오버룩처럼. 사람 발짝 소리가 나면 그들은 무척 반가울 성싶다.

모두가, 올해가 가기 전, 동네 도둑고양이라도 좋으니,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누군가를 하나쯤은 만나길.

내 이야기를 들어줬던 아홉 살, 겁많던 내 그때의 친구들처럼.

그래서 잘 살아보길, 부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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