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꼴 Aug 23. 2024

나이트메어

이벤트가 필요해

중간고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신림사거리에 있는 상영관 앞에 섰을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다. 무서운 이야기에 대환장을 했던 나는, 프레디크루거의 양서류 같은 비주얼을 조롱하며 아이들에게 사전에 허풍을 떨었던 바 있다.

실제로 영화관 간판에 걸린 프레디 우겨진 얼굴이 두꺼비와 볼락의 교배종 같은, 딱 만화주인공의 조연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때까진 웃고 떠들며 맘껏 자유로웠다.

나는 그때, 나이트메어의 뜻이 '악몽'이란 것도 몰랐다. 오락실과 만화가게를 오가며 학교 부록처럼 다니던 중이라 엄마가 하는 말로, 밤에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참으로 신통방통한, 아이였, 누구보다 겁이 없는 애라는 소리를 좋아했다.


 주인공 프레디는 불에 타 죽은 악몽 속에만 존재하는 연쇄살인마이고,

이 악마는 꿈속에서 아이들을 죽이며..... 종국엔 현실밖으로 기어 나온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엑스맨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현재 그러니까 2024년, 프레디에 관 이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1985년 13살이었던 내가 만난 프레디는, 너무 너무 무서웠다. 

이제껏 봐온 슬레셔 무비들 중, 나는 지금도 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사이코 살인마가 등장해 아무 이유 없이 엽기적으로 인간 사냥을 즐기는 그들과 달리, 프레디는 불온한 개성과 전략을 지닌 뉴페이스 살인마다.

그는 아동연쇄살인범으로 불에 타 죽었고, 그 일을 주도한 부모의 아이들 꿈에 나타다.  장갑을 벽에  그을 때 이는 파란 불꽃 하며, 상대를 빤히 쳐다보며 공갈을 해 마지않는 현대판 조커 같은 일면이 혼재된 악마다.

프레디 말이  많다고 해서 데드풀 떠올리면 안 된다. 그는 다스럽지만  약점을 단박에 아는 영리한 포식자이기 때문이다.

 


살덩이가 젤리처럼 엉겨 붙고  알사탕만 한 눈알이 뒤룩이고 긴 팔에 걸린 갈색 장갑칼과 중절모, 빨강 초록의 줄무늬 스웨터는 프레디의 전매특허다. 그는 언제, 어디까지 한풀이를 할지 예측 불허인 작자로, 해서 그 끝을 알 수 없고, 나타나는 장소가 꿈 속이라 도망칠 수도 없는, 최강의 무적이다.


피가 튀지만, 엄밀히 말해 이 영화는 스릴러에 가깝다.

꿈속에 낸시를 쫓아다니는 프레디의 이야기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고, 혼자 고군분투하며 프레디를 상대하는 낸시의 숨 가쁨. 다시 말해 가장 서늘한 진실은, 이 꿈이 대체 언제 끝나는가 하는 거다.

 

그가 첫 번째로 죽인 금발의 티나는,

대낮 교실 복도. 비닐모포에 피칠갑을 하고 나타나 낸시를 기절초풍하게 만든 장본인이고,  중절모의 프레디를 양서류니 볼락이니 하며 허세를 떨었던 나의 간담을 서늘케 한 당사자다. 

복도에서 질질 끌려가며 핏자국을 만들고, 천장에 거꾸로 기어올라가 내장을 투둑 떨어뜨릴 기세로 뱅글뱅글 돌며, 감옥에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고어하게 죽어 나가는 낸시의 친구들.

침대로 끌려들어 가는 낸시의 남친 글렌(조니뎁)이 뿜어내는 피폭포는 현재까지도 강렬한 명장면의 하나다.

욕조에 누워 잠을 쫓기에 급급한 낸시(졸릴 때 거품목욕은 쥐약)의 다리사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프레디의 장갑칼 그리고 수채구멍로 쑤욱 빨려 들어가고, 장갑칼에 난자될 뻔한 찰나 알람 소리 때문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잠이 깨는 낸시.

영화를 보는 내내 손톱을 쥐포처럼 뜯었던 기억.

 

영화가 시작하고 끝날 때 등장하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세 여자아이들의 줄넘기 장면은 뿌연 화면 처리와 노랫가사가  초자연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악몽'이란 신전을 지키는 파수꾼의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애들이 줄넘기를 할 뿐인데, 등골에 땀이 렀던.


하나 둘 프레디가 다가온다.

셋넷 대문을 잠가라

다섯여섯 십자가를 가슴에

일곱여덟 늦게까지 깨어 있어라

아홉열, 잠들지 말고


글렌은 낸시에게 '악마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무시하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팁을 주었고, 집이 불타고 엄마마저 프레디에게 살해당한 그곳에서, 프레디에게 등을 돌리고 가까스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낸시.

문밖을 나오니 화창한 날씨에 웃고 떠드는 친구들이 차를 탄 채 낸시를 부르고 있고, 엄마는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든다. 드디어 악몽은 끝난 건가. 그러나, 불시에 차가 떠나자마자 파란 문의 창문을 뚫고 장갑칼이 나와 엄마의 목덜미를 잡고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러니까, 아직 이곳은 낸시의 꿈속이란 거.


프레디는 이 영화를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세월은 흘렀고 수많은 아류가 탄생했다. 그중에서 전혀 공통점이 없을법한  2009년 닐블룸 캠프 감독의 걸작 디스트릭트 9에서 주인공 비커스의 변이 된 갑각류 팔이 문득 디의 것과 무척 닮아 있어, 의 저변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곱었던 기억.


1985년 영화관을 나온 이 후 나는 '나이트메어'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영화를 보지 못한 친구들에게, 일인 다역으로 전화기 너머 쑤욱 나왔던 빨간 혓바닥이 낸시의 입술과 얼굴에 닿았을 때의 그 음흉함과 역겨움을, 자신의 울퉁불퉁한 얼굴 가죽을 벗기며 근육과 뼈가 드러날 때 미소 짓던 그 괴기스러움을, 파란 현관문으로 사라진 낸시의 엄마와 그 장면 위로 오버랩되는 흰옷 입은 소녀들의 몽환적인 노랫말과 참신한 공포물의 탄생을, 수년간의 수련회와 파자마파티에서 반복 재생산해냈다. 아마도 88 올림픽까지 끈질기게 우려먹었던 듯싶다.

이후  데자뷔를 지닌 십 대들의 잠자리는 축축한 악몽으로 견인되기도 했거니와, 그 일부는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하여 작게나마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흠씬,

무섭거나, 슬프거나, 억울한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때의 감정이 일부 희석된다는 걸 느꼈던 최초의 경험이기도 했던, 그 시간들.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가게 됐다.

무거운 주제일수록 다분히 가볍게 처리하는 기술을 익혔다고나 할까.


그리고 가끔,

크게 위협하지는 않되 깜짝 이벤트 같이 왔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가짜라서 안전하고, 예기지 못해 가슴 서늘한  가공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때가 있다.


종종 빈속에 마시는 스벅 그란데사이즈만큼의 카페인이 필요한 지점이 있고


권태를 이길 재간이 없을 때,

바로 그럴 때.


꼭 필요하다.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 샤이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