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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Oct 20. 2024

영화 <미저리> 나는 하드커버가 싫다고 말했어

비가 와요, 비가 오면 우울해져요

과학실엔 노란빛이 찾아들었다.

나와 신영이는 벌써 두 시간째,  그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열쇠를 철컥, 걸어 잠그고 유유히 사라졌고,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우린 그곳에 감금되어, 그날의 잘못에 관한 일을 반성해야 하는 체벌을 받는 중이었다.




점심시간, 는 친구들과 분수대 앞 벤치에서 스크류바를 빨아먹고 있었다. 빨기도 전에 줄줄 흘러내릴 정도의 더위였다.  어디선가  "와! 진짜 덥다!"라는 말이 들려왔고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분수대에 첨벙 뛰어들어갔다. 일의 시작은 이러하였다.


60년 전통을 지닌 분수대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조형물이었다. 여름이면 물줄기가 제법 시원했고 그 주변 벤치에는 항상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은 미지근하고 수위라고 해봤자 종아리에 닿았지만, 분수대에 뛰어든 우린 물 만난 고기처럼 꺄르륵깔깔하며 놀, 바로 그때였다. 뒤통수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장 안 나와!" 담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아귀가 안 맞는 교내 창틀을 누군가 한꺼번에 억지로 당길 때 나는 마찰음 같이 이물스럽고 기괴했다. 게다가 그녀의 튀어나온 눈알에서 반사되는 시퍼런 레이저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멱살 잡는 느낌이었으므로, 우린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란 걸 알아챘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지만, 바로 현장에서 체포돼 끌려 나왔고 축축한 반성문을 썼다.


그런데 그중에서 신영이와 나만 통과를 하지 못했다. 신영이는 너무 학구적으로 쓰는 바람에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었고, 나는 더워서 잠시 들어갔다고만 짧게 쓰는 바람에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우리 둘은 과학실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인간의 내장이 구획별로 그려진 해부학 양장본으로 머리통을 한 번씩 세게 가격 당했던 것이다. 


내가 내장이 튀어나올 거 같은 통증을 느낀데 반해, 키가 크고 마른 허수아비 신영이는 몸전체가 출렁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쓰러졌다. 담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버렸고,  신영이는 머리통을 쥐어 잡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 울어!"

"아파서 울잖아!"

신영이의 울음은 구슬프고 길게 이어졌, 반성문에는 후드득 콧물과 눈물이 떨어졌다.

 

과학실 서가에는 표본이랄 것도 없는 지저분한 유리병들과 플라스크, 모둠에 맞춰 개수대로 구비된 손때 묻은 현미경들, 그리고 해골과 인체 모형이 있었다.

주먹을 살짝 대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거 같은 먼지 낀 그것들은, 해 질 녘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 담임이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석양에 지는 빛을 받아 얼굴 반쪽이 빨갰는데, 그래서 진실로 요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성은 했겠지! 한 번만 더 그래봐 땐 죽을 줄 알아!."

 

신영이는 집에 가는 내내 버스에서도 울었는데, 나는 담임보다도 신영이의 긴 울음이 너무 시끄러웠고, 양장본은 진짜 무서운 책이구나,  생각을 했었 듯싶다. 그리고 성인이 돼서 반드시 복수해 주리라, 그러면서 더 크고 단단한 가죽의 양장본으로 그녀의 머리통을 가격하는 상상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입소문이 돌았던 오함마의 공포  '미저리'를 비디오로 보았다.


오함마가 문제가 아니라 내게는 애니  '광기'에서 익숙한  군가를 연상했고, 그 둘 사이에 슷한 기류까지  포착하는데 이르렀던 것이다. 게다가 양장본 책까지 등장하는 것 아닌가.


묵직한 보이스의 캐시베이츠에 비해 칼칼한 목소리와 거칠었던 피부느낌이 다를 뿐, 영화에서 애니가 폴을 사육하, 온순그녀가  발작하며 드러내는 표정과 말투와 액션. 그 섬뜩한 위기 익숙한 그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담임은 교련선생님이었다.

교련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지 수순을 밟았고 이후 일부 명맥만 유지하다가 사라진 과목이다.

그녀는 소령 출신의 전직 군인이었고, 올드미스였으며, 학교에서도 유명한 군기반장이었다.


그녀의 룰에 따르지 않는 아이들은 타이슨 못지않은 그녀의 쇠주먹에 원투 펀치를 맞아 쓰러졌고, 그걸 옳바른 훈육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이었다. 교내 먹이사슬 가장 위에 군림하는, 전체주의의 완장을 찬, 재자.


우린 일 년 정도 교련과목을 거쳤는데, 오로지 자나 깨나 붕대와의 싸움이었다.

 

부목대고 붕대감기, 친구 머리에 둘둘 감기, 돌려 감기, 삼각건 모서리 각 잡아 맞춰 감기, 상체 감기.

또 좌향좌 우향우 좌향 앞으로 우향 앞으로 으아, 조금이라도 틀리면 소리를 꽥꽥 지르는 바람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던 기억들.


동작이 틀리면 언제 알아챘는지 미저리의 애니처럼 불시에 나타나 귀를 비틀거나 툭 불거진 왕방울만 한 눈으로 기선을 제압했던, 이트플라이급 교내 챔피언이라 할 만한, 주먹의 소유자.


우리들 중에는, 전쟁이 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의 핏발 선 눈을 마주하면 당장 내일 전쟁이 터질 거 같은 불안감을 느꼈고 덕분에 붕대 감는 손끝에 순발력이 생겨나기도 했다. 남고에서는 고무로 만든 모형 총을 들었다고 하는데, 우린 멀쩡한 친구의 머리에 둘둘 붕대를 감아 상투처럼 따 올렸고, 부목을 댄 팔과 다리를 너무 꽉묶거나 상체가 비대한 경우엔 붕대가 모자라 당황하다가 시간이 초과돼, 감정을 당했던 희한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붕대감기는 무엇보다 시간과 각도, 매듭짓기의 싸움이었다.


미저리를 보며, 나는 그 과학실의 빨간 어둠과, 우리를 노려보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섰던 후덜덜했던 그녀, 그리고 얼룩진 삼각건이 떠올다.



   

   


폴이 글을 쓸 때마다 머무는 외진 시골 도시 실버클릭.

그는 책을 끝내면,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와인 한잔을 마시는 루틴을 지녔다.

그 홀가분한 맘을 안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구불구불 눈길을 달리는데, 눈발이 점점 세진다. 침엽수림 사이로 폴의 65년 산 무스탕은 삐뚤삐둘 거리다가, 마침내 추락한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애니.

그녀는 빠루로 문을 열어 폴을 꺼내고  인공호흡을 한 후, 그를 어깨에 메고 사라진다.


침상의 폴이 눈을 뜨자마자 애니가 말한다.

"폴! 전 당신의 열렬한 팬이에요"


폴의 침상에선 온통 하얀 창밖 풍경을 볼 수 있다. 애니의 집은 산속 깊이 자리한, 멀리서 보면 길 잃은 나그네들이 꼭 한번 머물렀다 가고 싶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폴을 치료하며 애니가 말한다.

"어떤 날에는 당신을 쫓아다니며 불 꺼진 당신의 오두막을 바라보곤 했죠."

폴은, 그녀의 손길이 고맙.  천운으로 살아난 폴을 구한 사람이 전직간호사인 데다 자신의 열렬 팬이라니, 폴은 애니에게 기꺼이 자신의 소설을 먼저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앞날을 낙관한다.


미저리는 1탄에서 이미 백만 부를 넘겼고, 돈은 많이 벌었으며, 주인공을 안 죽이면 영원히 써야 하니 폴은 미저리의 마지막 편에, 그녀를 죽이면서 이 소설의 연재를 끝내기로 한다.



그런데, 애니라는 타락천사가 등장한 것이다.

멀쩡할 때의 애니는 폴에게 "당신은 멋진 시인이에요!"고 말해주는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보이지만


뭔가 수가 틀리면 밤중에도 들이닥쳐

동네 떠나가라 화분과 의자를 때려 부수고, 폴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살기만으로 사람 혼을 빼먹는 원격귀신같은 면을 보이기도 한다.


또 재밌는 건, 애니의 이런 발작버튼을 폴이 교묘히 달래고 반격을 노릴 줄 안다는 거다. 

허나 새로운 미저리를 써야 그나마 얼마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던  폴이, 새로운 종이를 사다 달라 조를 때, 화를 누르던  애니가 빨간 양장본 책을 휠체어에 앉은 폴의 장딴지에 세게 내리치고 가는 장면서, 나는 보았다.


빨간 양장본의 책을, 그리고 그게 얼마나 아픈지를.




자고 있는 폴 앞에 갑자기 나타나,

"미저리 채스턴은 죽으면 안 돼! 영혼은 필요 없어,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늙고 더러운 거짓말쟁이야!"

를  외치는 애니의 얼굴과 괴팍한 목소리,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두 팔을 보라. 그녀는 6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시상한다. 이 사람 안 주면 누굴 주냔 말이다. 그렇게 독보적인 사람.


폴의 미저리 완결판에서 그녀를 부활시키라고 종용하는 애니와 살아남기 위해 그녀의 말대로 산채로 묻혔던 미저리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는 폴.


"미저리가 살아났다!, 미저리가 살아났다!"

미쳐 날뛰는 애니의 꿈꾸는 듯한 천진한 얼굴 하며 왈츠를 추듯 뱅글뱅글 돌며 폴을 향해 입에 손을 갖다 대고 하트를 발사하는 장면, 그 하트를 손으로 받아 채는 위트를 발휘하는 폴의 복잡한 눈동자 이 모든 요소들이 버무려져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잔혹극을 만들어냈다.



탈출을 시도한 폴에게, 애니는 벌을 내리기로 한다. 당근과 채찍의 달인.

거의 회복된 다리 사이에는 두꺼운 각목이 들어가고, 붉은 오함마를 정수리 위로 들어 올려 두 발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애니의 광기는, 30년이 지나도록 모두가 기억하는 고어한 추억이 됐다.


그렇게 폴의 두 발을 모두 날려버린 후, 애니가 말한다. 

"사랑해요. 폴."




폴의 사고 이후 애니의 극진한 간호, 둘 사이의 갈등, 미저리의 부활, 애니의 죽음.

이게 서사의 전부다.


그런데 틈이 없다.

그건 어쩌면 대사의 힘이다.


"비가 와요, 비가 오면 우울해져요

당신이 처음 왔을 때 작로서의 당신을 사랑했는데 당신의 전부를 사랑하게 됐어요"

이런 센티멘탈한 애니와,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라고 말할 때의 애니는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놀랍다.



호호백발 보안관의 활약상 중,

폴이 쓴 미저리의 한 구절, '인간의 정의보다 더 높은 정의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정의로 심판받겠다.'

이 한 구절만으로 애니가 폴을 납치했다는 상황을 추적한 노장보안관의 두뇌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타리존스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가는 영민함과 재미를 담보해 줬다.


아무도 그녀를 당할 수 없다, 그래서 폴은 그녀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리기로 한다.

클라이맥스, 미저리의 생부를 알고 싶어 하는 애니를 애타게 만드는 폴. 그리고 언제나처럼 담배 한 개와 와인 한잔을 주문하는 폴. '니가 내 발을 날렸지? 나도 날려주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애니의 벌건 눈앞에서 원고를 태우는 폴.

"아! 내 미저리 태우지 마, 내 미저리!"

둘이 엎치락뒤치락 육탄전을 벌인다. 쓰러진 애니의 입에 미저리 원고의 재를 쑤셔 넣는 폴, 그리고 그렇게 사랑했던 폴의 타이프라이터에 엎어져 얼굴이 박살 난 애니. 마침내 폴의 가슴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은 애니를 확 밀어버리는 폴.


미저리(Misery)는 고통이란 뜻이다.

흔한 소재인 사생팬 스토커에게 처절하게 당하는 유명인의 이야기일 뿐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숨 가쁘게 달리는 기분이다.


호흡이 빠르지도 않고, 등장인물이 다양하지도 않으며, 고즈넉한 설경이 비치는 폴의 침상에서 대부분의 일들이 벌어지는 이 단순한 구조에서, 영화를 보는 중간에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빠져들게 하는  몰입감이란, 명작이 주는 선물임에 분명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적증명서를 떼러 학교를 한번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때 교무실에서 우연히 그녀 만났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며,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지내지 않았지만, 잘 지낸다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조금 떨었던 거 같다.


폴이 2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후, 레스토랑에서 애니의 환상을 보고 기겁을 했듯이. 내게도, 그녀는 그런 존재였던 거 같다.


그래도,


부디 어딘가에서 잘 살고 계시길 바란다.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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