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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Oct 13. 2024

영화 <세븐>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밀알이 되고 싶지만

독수리5형제를 기다리며

7가지 죄악,

7번의 살인,

7일간의 행적.


세븐은 20년 가까이 된 영화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했다 해도, 영화 전혀 늙지 않아 새롭고 놀랍다. 간이 흘러도 명작인 이유가 있다.


세기말 풍경과 흡사한 도시의 어둡고 우울한 거리, 창밖 패걸이들의 저주 섞인 욕설과 시궁창 같은 군상들의 면면, 그 더러운 하수구로 빗물이 흘러드는 이 풍경은 1993년 리들리스콧의 '블레이드러너'의 무대와 닮아 있다. 그곳은 핵전쟁 이후 혼돈과 무질서, 산성비가 내리고 인간성이 상실된 곳이었는데, 세븐에서 형사 머셋과 밀스가 추적추적 비를 맞아가며 거니는 그 거리가 내게는 더 무풍지대스럽다.


네오 아르의 효시라 불릴만한 영화. 

영화는 내내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기운이 만연해, 기차가 지날때마다 흔들리는 밀스의 집처럼, 불안하고 어둡다.

데이빗 핀처는 완벽주의자답게 회색지대의 회색인들을 노련하게 그려냈다.


제노비스 신드롬이라는 말을 이 영화에 대입해 보면, 존 도가 일곱 명을 살해하며 그 일을 기념비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 그 저변을 알 수가 있다.


제노비스신드롬이란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위기에 처한 사람을 나몰라라 하는 심리다. 방관자효과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1964년 뉴욕시 퀸즈에서 자기 집으로 가던 제노비스가 새벽에 살해를 당했는데 이를 38명이 30분 넘게 지켜봤음에도 바로 그녀를 돕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연쇄 범죄의 배경에는 제멋대로 사회를 바꿔보려는 범죄자의 의지가 적극 반영돼 있는 거 같다. 작년에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묻지 마 범죄도 그렇고, 이런 더러운 사회 혼자 죽느니 같이 죽겠다, 내 죽음을 알아달라, 이런 호소.

연쇄살인마 유영철도 카메라 앞에서, 부자들을 훈계하지 않았는가.


세븐의 두 주인공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녔다.

머셋은 퇴직을 7일 앞두고 있는 형사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떠나고 싶은 사람이다. 그에 반해 밀스는 혈기왕성한 강력계 형사다.

머셋은 밤마다 메트로놈에 의지해, 잠이 들곤 하는 사람으로 이 도시의 삶이 하루하루 버겁다.



영화는 단테의 신곡 중 식탐, 탐옥, 나태, 교만, 욕정, 시기, 분노 7가지 죄악에 따라 일어나는 연속적인 살인을 다룬다.



존 도는 사회의 무관심 때문에 살인을 한다는 명분을 드러낸다. 방관자들을 혼내주겠다는 건데, 그의 집에서 발견된 2천 권의 노트에는 각 250쪽에 걸쳐, 존 도 자신의 살인에 관한 단상이 들어있는데 그중 한 구절.

"우리는 지저분한 무대에서 춤추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일 뿐이다"

말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존 도. 도시무질서를 바로잡겠다고 그가 벌인 연쇄살인은 치밀하고 잔혹하며 대담하다.



첫 번째 살인 식탐.

12시간 동안 계속 음식물을 먹게 한 후 배를 차 장기를 터뜨려 죽인다.


두 번째 살인 탐욕.

비리 변호사 스스로 1파운드의 살을 도려내 저울에 달게 해 죽인다. 베니스의 상인 샤를로의 역할 대행을 시킨 죽이며,


세 번째 살인은 나태.

죽은 변호사의 와이프가 찾아낸, 거로 걸린 액자뒤 누군가의 지문으로 쓰인 'Help me'를 추적했더니 주인공은 마약상 빅터. 그는 1년 동안이나 손목이 잘린 채, 침대에 묶여 해골만 앙상한 상태이나, 검시반 앞에서 갑자기 숨이 훅 터진다. 그러나 곧 죽을 목숨. 데이빗 핀처의 연출은 이렇게 살벌하다.


머셋의 기지로, 도서관에서 존 도라는 남자가 7개의 죄악에 관한 서적을 빌려봤다는 첩보를 입수해 드디어 살인범의 주소를 알아낸다.

그곳에서 와일드빌 가죽전문점 영수증과 방대한 살인일지, 그리고 살인현장의 사진들을 발견할 때 존도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형사들을 갖고 노는 존 도.


네 번째 살인 욕정.

클럽에서 매춘을 하려던 한 남자가, 존도의 협박으로 와이드빌에서 수공으로 제작한, 30센티의 칼날이 달린 성기로, 매춘부를 죽인다.


다섯 번째 살인 교만.

존 도가 전화를 걸어와 '또 일을 저질렀네'라고 말한다. 찾아가 보니 현장엔 코가 잘린 여성이 수면제와 전화기를 든 채, 죽어있다. 코가 잘린 채 살 것인가, 아님 자살을 할 것인가.


클라이맥스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존 도가 택시에 내려 자수를 하는 장면이다.

우렁차게, 계단을 오르는 머셋과 밀스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진정 사이코패스의 지존이다. 그리고 그들은 존 도와 함께 남은 두구의 시체를 찾으러 떠난다.


여섯 번째 살인, 시기.

존 도가 말한다. 밀스의 행복을 시샘했노라. 그래서 밀스의 아내를 남편행세하며 참수했노라고.


일곱 번째 살인, 분노

밀스가 분노로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에, 그를 자극하는 존 도를 향해 여섯 발의 총을 쏜다.


이렇게 일곱 개의 살인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모두 남의 일에 무관심하잖아.

강간을 당할 때도 도와달라고 울부짖을 게 아니라 불이야,라고 외쳐야 해.

도와달라는 소린 무시하고 불났다란 소리엔 달려오니까

/ 이건 형사 머셋의 말.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해. 그래야 호들갑을 떨며 주의를 기울이지

/이건 연쇄살인범 존 도의 말.


연쇄살인마나 형사 머셋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같은 관점을 지닌 셈이다.

머셋은 은퇴해 빨리 이 범죄도시를 떠나고 싶어 했고, 존 도는 설교자로서 이 방관자들의 사회를 자신의 방법(연쇄살인)으로 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둘은 비슷한 생각을 지녔지만 가는 길이 달랐을 뿐.


머셋이 떠나고 싶어했던 그맘이 십분 이해가 간다.

도망친다기보다, 누군가 나서서 판을 뒤엎고 이 범죄 소굴을 새롭게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거라는 좌절감. 아귀처럼 물리고 물린 이들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백날 뛰어봐도 헛수고라는, 무력감.

나는 머셋이 이 도시를 그만 떠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사람은 잘 변하지않는다, 그런데 하나의 '도시'가 아니던가.

 

지엽적으로,

이 사이코 선생의 살인행각 30센티의 매서운 칼날 성기를 끼고 살인을 저지른다는 그상상력은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독의 취향인지 꼭 묻고 싶어지는 대목이 있었다.



존 도를 연기한 케빈스페이시는 사생활이 추잡하든 어떻든, 연쇄살인마로서는 이보다 더 광기어릴 수는 없다,고 평하고 싶다. 밀스를 도발하며, 자신을 죽이라고 지그시 눈을 감고 미소짓는 그 얼굴은, 7가지 죄악을 다 이루었다는 후련함, 자신이 이룬 기념비적인 살인을 능가할 살인마는 당분간 나올  없을거라는 자신감의 발현쯤으로 보인다.




사람 관계는 참 어렵다.

그중  디테일이 렇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를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결혼식장에 가서 밥값이 8만 원인데 10만 원을 내는  옳은가, 더 내야 하는가.

장례식장에 가서(아주 배고픈 상황), 상주들이 빤히 보이는데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어도 되는가.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이 얼굴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교촌 허니콤보를 시킬지 굽네 고추바사삭을 시킬지 고민을 해도 되는가.


팍팍한 일상을 살지만, 그래도 정의롭고 싶은 잘 안되니, 십 년 전 센델의 책이 렇게 잘 팔렸나 보다.

공리주의와 칸트의 도덕법칙,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을 이뤄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정치,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 그렇다면 진짜 정의는 실현되는가. 그래서 현세에 정의가 살아 움직이는 사회를 과연 만날 수 있는가. 난 몹시 궁금하다.


우린 어디를 가든지 본성 대로 살게 되어 있는 듯하다.

딱 끊어낼 필요도, 너무 오지랖을 떨 이유도 없다.

내 맘 가는 대로, 공동체의 선을 지향하지만 내 소소한 이익과 행복이 우선이면,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는 개똥철학을 난 갖고 있다. 


장례식장에 가서 망자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가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라면서도, 내 쩨쩨한 인생이 그래도 이곳 이승에 남아 있음을 안심하고,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나 자신, 썩 훌륭하진 않았도 그닥 나쁘지도 않다는 자각. 


어차피 나도 곧 걸어가게 될 공평한 길이니까.  

돌이킬수 없는 실수나 과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준 상처나 내 결핍, 풀지 못한 오해. 이런 것들을 싹 끌어 안고 한번에 사라질수 있다는건, 현세에 위로가 된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겠지만, 인간은 타인의 문제는 금세 잊거나 티끌같은 것으로 여기는 본성이 있음으로, 사후의 일까지는 걱정하지 않는다. 알아서들 할테지.




지난 주말, 재수하는 아들 녀석을 라이드 해주고 돌아오며 주차장에서 접촉사고를 일으켰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일을 고민한 건 아니었고, 메가박스에서 재개봉하는 아이언맨(마블 찐팬)을 몇 시에 볼 건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주의하게 차를 댔는데, 궁둥이가 세단 머리에 닿은 것이다.


나는 벼락 맞은 지팡이처럼 머리털이 곤두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매의 눈으로, 그 차량이 무엇인가부터 살폈다. 아. 빤질빤질한 그분의 이름은 신형 BMW530i. 차량 보닛 내 절망스런 얼굴, 치집을 한 머리통 보정없이 그대로 비췄고, 난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정신을 수습한 나는 얼른 차로 건너가 글러브박스를 열고 안경닦이를 꺼냈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쪼그리고 앉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기스난 부위를 호 열나게 닦아보았다. 오호라, 얼핏 보면 전혀 스크레치가 보이지 않았다, 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수분 후 쥐똥만 한 정의감을 발휘해 차량에 있는 번호로 힘없이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차주는 매너 있는, 물광피부의 젊은 여자였다.

나는  향해, 최대한 비굴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사모님, 정말 죄송해요, 재수생 태워주며 머리가 복잡했나 이런적이 없는데, 번거롭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사모님"

나는 서너 번 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는, 말끝마다 사모님, 사모님을 불러댔다. 


나는 그러니까...... 그녀가 나를 공부 못하는 재수생을 둔, 생계형 갱년기 아줌마로 봐주길 기대했다.

그래서 비용을 쇼부치고 싶었다.

"과잉 수리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 넣을게요."

나는 돌아서는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시 깊이 고개를 이며 사모님, 들어가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때의 상황이 녹취됐다면, 목소리에서 파리넬리 저리 가라 간신의 얇은 목소리가 났으리라.

 



밀스가 존 도를 죽이고 경찰차에 이송되는 장면을 뒤로하고 떠나는 머셋이 독백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헤밍웨이가 말했다.

세상은 멋진 곳이고 싸워서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그 문장의 뒷부분에 나는 공감한다, 고


머셋은 그래서 은퇴 후, 호젓한 일상을 뒤로하고 이곳 무협지대에 남기로 한다.

그래도 이런 사명감을 지닌 소의 사람들 때문에 이 지구가 그나마 남아나는 듯다.



그렇다.

세상은 멋 곳이고 싸워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같은 간신배말고, 지구를 지키는 머셋 같은 부류의 '독수리오형제'가 반드시 어딘가엔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산다. 수줍게도 앞장서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기영차 이끌어만 준다면, 물개 박수와 함께, 대걸레라도 들고 나와 걸어갈 정도의 신의 내게 있다. 이게 나의 미약한 '정의'다.


여하튼,

나는 물광피부 사모님의 말대로, 수리비가 과잉청구되지 않기바랐만.

 

보험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님 미세한 스크레치여서 너무너무 안타깝네요

하지만 센서부위에 닿아서, 렌테비까지 대략 300만원이상 청구될 듯합니다, 고객님. 고객님? 여보세요?"




그러니까, 는 가슴으로는 뜨겁게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밀알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선 웬지 가루가 된 느낌.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가을은 깊어가고,

은 소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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