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꼴 Nov 09. 2024

바바리맨과 나란히 석양을 바라봤어

호퍼의 객실열차에서 나는 참외를 끌어안고

할머니가 사라졌다.

어쩌면 우린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일련의 일들,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외대 앞에서 수십 년 하숙을 치며 모았던 돈을 아빠가 해수욕장 사업을 한다고 가져가 홀딱 말아먹었을 때, 이후 삼대독자인 손자가 사고사 했을 때, 이어 무일푼 사채에 시달리던 아빠가 알콜릭이 돼 사람구실을 포기했을 때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고로, 이 망해가는 집구석 때문에 나는 스무 살에 취업을 해버렸다.


어셔가의 늪지로 빠져드는 이 가여운 가족이란 구성원들을 그래도 살려는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몰락한 집안의 영웅 심리가 발동됐든지,


아니면 천륜이란 이름의 빨간딱지의 효력 때문이었는지

수재민에게 성금을 냈던 적도 있는데 이건 가족의 일이 아닌가. 런 모호한 심정이었던 거 같다.


그러니까 그런 모호한 감정의 나는 아빠로부터 평생 일 집을 빼앗긴 할머니에게 누가 그러란 것도 아닌데 마음의 빚을 가졌다. 빚을 갚아야 하는 건 아빠였는데, 나는 이 인물을 대체 고쳐쓸 수가 없다는데 이르러, 첫 월급을 받고 종로에 나가 금반지와 참외를 사들고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수개월 전에 이사를 나갔다고 했다. 그녀는 번듯한 자신의 하숙집이 넘어가고 나서, 그 집에서 가장 싼 방에서 월세로 살고 있던 터였다. 어두운 방에 짐을 꾸려 넣고 쥐며느리처럼 동그랗게 앉아 있었을 그녀. 부르스터에 양은 냄비를 올려놓고 하나뿐인 아들을 끓여먹어도 시원찮을  그런 분노감에 휩싸여 있었을테지.



나는 금반지를 끼워주며 그래도 멀쩡한 내가 있지 않느냐, 참외도 깎아주면서 이 가여운 노인네를 잠시라도 위로할 맘을 갖고 지하철을 탔던 것이었다. 집주인은 나를 위아래 훑어보았고, 남아 있는 부르스터와 잡동사니를 어떻게 하겠냐며 물어왔다.



토요일이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사람 찾기라도 해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도리없이 나는 무거운 참외를 들고 다시  지하철을 잡아 탔다.



축제가 있는지 회기역에서는 학생들이 레밍떼처럼 똘똘 뭉쳐 어디론가 흘러들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잠을 입고 잇몸 만개한 웃음을 짓고 어깨동무를 하거나 장난을 치는 학생들 사이에 나는 참외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내 어깨를 치고 가기도 했고, 해서 나는 소중한 보퉁이처럼 참외를 가슴팍에 움켜쥐는 행색으로 지하철 올라탔다.




열차는 요일치고는 한산했다.

다들 집에서 자거나, 산책을 나갔거나, 가족들과 외식을 하겠지.

회사에선 부서이동 배치가 있었다. 막내인 나는 컴퓨터를 옮기고 청소를 하느라 4시가 넘어서야 나왔고, 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허탕을 친 후 지하철을 집어 탔을 때는 이미 7시가  돼 가고 있었다.



나는 물먹은 널빤지처럼 늘어지고 싶었지만 그나마 지하철이 만석이 아니어서 다행이란 맘이었고 자리가 나자마자 잰걸음으로 가 풀썩 앉았다. 오랫동안 걸어 다니고 치이느라 까만 비닐봉지의 손잡이는 늘어져 참외가 바닥에 떨어질 지경이어서 나는 금방이라도 비닐째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참외를 가슴에 안고 버티었다. 그렇지, 버티는 거지.



일호선 라인은 밖이 훤히 보여 그나마 맘이 시원해졌다.

나는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참외를 놓쳤나. 참외 한 개가 바닥에 또르르 굴러 떨어질 찰나 난 눈을 떴다. 참외는 누군가의 발끝에 걸렸고, 사내는 참외를 잡아 조용히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곤 동시에 내 옆자리가 났고, 사내가 차분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나는 참외 때문이라도 졸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마리오네트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사내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었나.

깜짝 놀라, 나는 눈을 떴고 자리를 고쳐 앉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냥 그런 이물스러운 기운 말이다. 누가 나를 잡아채지 않았는데도 오싹해지는 기운.



내 옆 사내는 자크를 열고, 소중이를 꺼내 쓰다듬고 있었다.

참외를 건네줬던 그 다소곳한 하얀 손이었다. 창밖으로는 해가 지고 있었고, 빨간 물이 바닥을 반쯤 적셔왔다.

사내는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의 소중이에게까지 석양이 들었다.



나는 끈 떨어진 비닐 속 참외를 끌어안고, 사내와 석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사라진 할머니를 생각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인생 말이다.

아빠도 태풍을 만나 만신창이가 될 것을 알았으면 속초 가지 않았을 것이고,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동생이 밀물과 썰물의 조수간만의 차에 대해 잘 알거나 부모와 함께 바다를 한 번이라도 다녀봤더라면 물에 휩쓸리지 않았을 것이고, 사내도 태초부터 소중이를 쓰다듬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지. 


모든 일이 그냥 손써볼 새도 없이 그리 흘러가 버렸던 것. 런 것.



소중이의 이 사내는 굴러 떨어진 참외를 친절하게 내게 쥐어주고는, 왜 이 해 질 녘 이곳에서 자신의 소중이를 쓰다듬고 있는, 



사내는 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도 시선을  집요하고 빠르게 지나는 창밖을 향하고 있었고,

그렇게 나는 렁거리는, 맘을 안고

사내 옆에서(함께) 열차 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 건너편에 앉은 노인이 소중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 씨부럴 놈 허는 짓거리 보소!"

 


그러자 사내는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벌떡 들어 올리고 소중이와 함께 옆칸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 멀쩡해서 노인의 호통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그 자리에서 소중이를 쓰다듬다가, 노을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었고, 그와 나란히 앉았던 이곳은 마치 호퍼가 그 '객실 열차'같아,




나는 그의 퇴장이 몹시 쓸쓸하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