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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Dec 18. 2024

내 뜨거운 아버지를 트렁크에 싣고

feat.검정콩


아빠는 고분고분했다.

묘를 개장한 인부는 두 명이었다.

개장이 끝났는지 한 명은 곡괭이를, 한 명은 하얀 박스를 들고 비탈을 내려왔다. 그리곤 아빠를 내게 건넸다.

아빠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내리막길을 지나 차있는 데까지 걸어가는 동안, 덜그럭거리는 아빠행여나 바닥에 쏟지는 않을까 발끝에 힘을 주며 걷기에 바빴다.


나는 아빠에게 차의 조수석을 내어줄까 했지만, 그냥 트렁크에 넣는 걸로 맘을 정했다.


아직 서류를 접수하고 일산화장터를 지나 분당 추모공원까지 가서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 아빠를 7층에 안장해야 하는 긴 여정이 남아있었다.


나는 시립묘지 사무실에서 여러 장의 서류를 들고 서서 수속을 밟았다. 

도장을 서너 군데에 찍고 안내문대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트렁크 속에 아빠가 있는 줄도 까맣게 잊어버렸,

 

화장터에 가기  커피 한잔 , 울퉁불퉁한 길을 내려가며 그제야 트렁크에 있는 아빠 떠올렸다.

나는 아빠를 트렁크에 넣어 놓지 않고 안고 다녔다면, 화장실이나 편의점에 놓고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 조심해라.


그렇게 트렁크 속 뼛조각들이 부딪치며 내게 말을 는 듯했다.

30년 만에 난 당신의 뼛조각들조차, 어쩌면 시큼털털한 숙취러나오는 건 아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른 아침 곡괭이질에 놀랐을 당신이

처음 타본 딸내미의 차 트렁크에서 주눅 들었을 당신이, 잠시 애석했다.



가까스로 파주에서 일산까지 시간 맞춰 화장터에 닿았다. 조급한 맘에 과속방지턱을 덜컹 넘을 마다 혹시 놀란 아빠가 거무튀튀한 행색으로 스에서 튀어나와 나를 놀래켜주는 건 아닌가, 장이 리다가도

그건 어쩌면 뿐 아니라 신도 놀라기는 매일반일 테지, 하는 잡다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실수가 있어선 안 됐다.


분당 모공원의 직원들은 6시 반까지만 기다려주겠다고 볼멘소리를 했던 터이고, 그 시간에 닿지 못한다면 나는 아빠를 트렁크에서 하루 재우거나, 유골함을 들고 들어가 선반 어딘가에 올려놓고 밤새 당신의 존재를 곱씹을게 뻔한 관계로, 맘이 급했다.


하룻밤일 뿐인데도, 그랬다.


그러니까 9시부터 오후 6시 반까지 개장을 하고 화장터를 들러 납골당까지 무사히 아빠를 데려다 놓는 게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미션 임파서블 저리 가라의 속도전이었다.


서류를 접수하고, 30년 전 죽은 아빠에게 남들처럼 인사를 건넸고, 아빠는 순번대로 화염 속으로 들어가 삼십 분 만에 뽀얀 가루가 돼 내게 돌아왔다. 유리벽 너머 뼛조각을 갈아 착착 종이에 접어 넣는 청년의 현란한 두 손을 나는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마지막 진공 항아리에 들어간 아빠를 받아 들고 나는 다시 트렁크에 아빠를 넣었다. 아빠는 종일 형체를 바꾼 채 어딘가로 연속 들어가고 있었고,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게 흐트러져있는 책들로 벽을 만들고 그 사이에 유골함을 고정했다.


연꽃이 그려진 항아리에 들어간 아빠는 조용했다. 

평생 시끄럽게 굴었고, 나를 귀찮게 했던 사람.


내게 마지막으로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의도였을까, 항아리는 뜨거웠다.

  



아빠의 급작스런 이장은 언니 때문이었다.

추석 당일 언니가 죽었, 그건

백혈병 발병 후, 두 달만의 일이었다.

간경화가 아닌 백혈병이라니. 

알콜릭으로 마지막 남은 동생인 나에게 마저 외면당한, 고독한 죽음.

  

3년 동안 나는 언니를 보지 않았고, 마지막 60일 동안 세 번을 만났다. 로나가 막바지였고 한낮의 기온은 35도에 육박했다. 진료가 늘어졌고 해서 나는 차에 언니를 태운 채 진료를 기다렸다.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언니가 말을 걸었다.


이사 간 집은 몇 층이냐. 남향이냐.

아니 남서향.


살이 좀 쪘냐?

란 말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났다. 


나는 이을 오래전부터 계획에 넣어놨었고, 시뮬레이션을 돌렸지만 추석 당일, 발병 두 달 만에 사라질 거라고는 알지 못했다. 


병원소속 장례업체에선 유골함을 고르라고 내게 샘플을 보여줬고 나는 학 두 마리의 뾰족한 주둥이가 도드라진 항아리를 골랐다. 그땐 그게 학인지 두루미인지 타조인지도 몰랐다.

 

담당자는

차분히 골라보라며 내 핸드폰으로 샘플사진을 몇 개 전송해 놓겠다고 했다.

 

얼렁뚱땅, 장례식을 끝내고


나는 외로웠던 아빠와 언니를 한 곳에 모아보기로 맘을 먹었다. 때 행복했던 어떤 날처럼, 가족이란 울타리를 남들처럼 만들어 보고 싶었달까. 그게 납골당이면 어떤가.


게다가 아빠는 후일에 하나뿐인 나마저 사라지면 연고도 없는 파주 시립묘지에서 멀뚱히 누워 있어야 할 판이었으니까.  


언니의 발인 전날 밤 엄마에게 내 계획을 말해주었다.

엄마는 단박에 좋다, 고 해주었고, 늦게라도 가족이 모일 수 있다니 기뻐하는 눈치였다.

 

몸과 맘이 흐릿한 엄마의 

짙은 반영구 눈썹이, 영정 앞에서 울 때마다 너무 도드라져 나는 그 부조화에 화가 났다. 엄마는 동네 미용실에서 반영구 눈썹을 한지 일주일이 채 안 됐고, 언니가 이렇게 빨리 갈지 몰랐다며 길게 울었다.


내 핸드폰 갤러리에는 이미 언니와 아빠의 유골함 샘플들이 가득했다.


잘 골라보세요.


학이 날거나 앉았거나, 난이 그려졌거나, 나비가 날거나, 금국화가 폈거나, 연꽃이 그려진, 그리고 고가의 십장생자개까지 종류도 다양, 진공으로 하면 십만 원이 더 비싸다는 안내와 함께.

   

언니를 진공 유골함에 빵빵하게 넣고 돌아온 다음날 나는 새벽같이 아빠를 개장하러 파주로 향했던 것이다.

화장 일정이 잠시 늘어진 그 사이로 대기시간을 안내받은 후, 가까운 식당을 골라 국밥을 먹으러 갔다.


순댓국을 먹는데, 뽀얀 김이 안경에 서렸다.

내장 부속이 너무 많아 골라내는데 갑자기 코가 알싸했다.

아빠는 편식하는 나를 향해, 밥상에서 숟가락으로 탕! 소리를 내며 혼을 낸 적이 있었다. 러면 언니는 내가 골라놓은 검정콩을 얼른 먹어치고, 그 대신 자신몫의 계란말이내게 남겨주었, 보드라운 사람이었고


아빠 역시 정신이 망가지기 전,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티비에 나오면 마당에 있는 나를 큰소리로 르며

 

이수야, 니 수철이 오빠 나왔다!,

호들갑을 떨었던


잠시 그런 소박한 사람이었다.

 



뜨거운 내 아빠를 트렁크에 싣고

나는 분당 추모공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후드득 앞창에 달라붙었고,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도착해야만 했으므로 나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아빠.

망자들의 레지던스라고, 그렇게 생각해 봐.

천당아래 분당이라잖아

(언니도 있고 말이야.)


당신이 원했던 그 고요한 세상.

어둡고 축축하지 않은

남향집...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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