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바쁜데 아침부터 웬 장난전화.머리를 말리다 말고 전화를 받는 통에 바닥엔 물이 톡톡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어매몰차게 끊어버렸다.
그런데 득달같이 벨이 다시 울렸다.
"아니 전화를 왜 끊으십니까?"
상대는 전적이 있는 듯 씨근거렸다.
나는 얼른 수원지방경찰청 번호를 검색해 봤고, 발신번호를확인한후, 대체 왜 형사가 나를?
어안이 벙벙한 채 그와 말을 이어갔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에 있었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아 잘 모르겠고 자정이 넘은시간이니 당연히 집에서 자고있었을 거라고 대충 설명을했다.
"아닌데요."
형사가 정색을하며
"당신은 그 시각 K역사 앞에 있었는데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이 태도는 무엇? 그리고 내가 그날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알고 나를 추궁하는 거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영화 '살인의 추억' 지하 취조실?
"제가요?"
그럴 리 없었다, 학원일이 끝나면 아이 때문이라도 집으로 쏜살같이 오는 게 일상이었던 때문이다.나는 다시 한번 의심이 갔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고압적인태도에서 왠지 모를 중차대한 뭔가를 감지했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란 그의 차갑게 목소리에 이 기회는 한번 살려보자 곰곰 생각을 하다가
캘린더를 확인해 보니, 아하! 맞다. 그날 속썪이던 교사와 싸우고 나서 K역사 앞에서 맥주를 마셨구나, 그녀의 집이 K역 근처라 맞다, 그날 나는 거기 있었어.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어떤 큰 실기를 범한 기분이었다.
"아아아 형혀허사님, 생각났어요! 제가 착각했네요. 그그날 거기서 맥주를 마셨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버퍼링이 걸렸고, 변명조의 대답이 될까 상대에게 확신을 주려면 어떤 억양 이어야 하는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그런데 '어쩌면 내가 살면서 알지못한 범죄를 저질렀던 건 아닐까. 아니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사기를? 아님 수년전 다단계에 빠졌던 엄마의 미납금?'
형사는 얼마 되지 않은 일을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취조하듯 물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우선은 내게는 아무 혐의가 없다는 걸 그에게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가만있어봐, 대체 이 상황이 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아니 형사님, 근데 대체 아침댓바람부터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일단은 왜 전화를 하셨고 제 그날의 행적을 왜 물어보는지 먼저 밝혀주셔야 하지 않나요?"
하며 반격을 시도했다.
형사는 많은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느라, 매뉴얼대로 질문을 건네는 거라고 답했고, 그날 그 시각경기남부 연쇄실종자가 검은 차량에 납치되던 그 현장의 500미터 반경에 '내가'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기지국에서 나온 번호대로'납치'된 그 상황에 관한 목격자를 찾고자 전화를 넣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그 납치사건의 현장에 내가 있었고 그 사건의 목격자이면서 지금까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당신은 뭔가를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은 거 아니냐!
이처럼형사가 내게 전혀 하지도 않은 말들을 상상하기에 이르렀고 처음과 달리 몹시 조급해졌다. 이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그를 설득해야 할 것만 같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등장하는 목격자들의 무너진 일상과 그들의 호소, 모자이크 한 얼굴뒤로 늘어선 푸른 술병들과 약봉투들이 팝업처럼 머리통에 파다닥 뜨기 시작했다.
'연쇄실종자라고?혹시 연쇄살인?
그럼 K역사 앞에 높이 걸린 그 환하게 웃고 있는 현수막의 주인공?'
현수막에는 한 여자의 얼굴과 그날 실종 당시의 인상착의와 납치 정황이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 길을 오가면서전혀 나와 관련된 일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 시간대에 나와 통화를 했던 이들의 리스트를 불러주었다.
"전 그날 통화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요"
정확히 듣지도 않고 다시 발뺌.
'너무 빨리 답했나?' 아니실제로 그날은 살짝 술이 취해 있던 터라 내가 다섯 통이나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는 자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남편번호 말고는 죄다 기억이 안나는 번호들이기도 했다.
죄가 없는데도 뭔가 음흉한 일에 끌려들어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고머릿속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랄까.나는 내가 봤던 셀 수 없이 많은 누아르 속 꾀죄죄하고 소심한 피의자들처럼 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쫄아서.
앗! 그리고 그가 혹시좀 전에 K역사에 간 적이 없다고 했던 내 발언과 지금의 이 발언, 이 두 개의 연속발뺌을 근거로 나와 실종자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진 않을까, 혹은 연쇄납치 혹은 연쇄살인마의 조력자로?
영화 속 범죄에 연루된 나쁜 형사들처럼. 그렇게 좋지 않은 머리를 굴릴려니 눈알까지 굴러갈 지경이었다.
'이건 아니지 빨리 정정하자.'
"잠시만요 형사님! 번호 좀 다시 말해주세요"
형사는 다섯 개의 번호를 AI처럼 불러줬다.
번호는 다섯 개였고, 나는 그중에 세 개는 알지만 두 개는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그래서 남편과 학원교사와 친구는 알아맞혔고, 번호 두 개는 모른다고 했는데 형사는 이상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중 하나의 번호는 엄마였던 것이다!
엄마 번호를 모르는 딸이라? 아 망했다.
나는 말을 똘똘하게 하려고 톤을 높였었나.
"맞습니다! 형사님! 그거 제 엄마번호예요! 어머나, 내가 미쳤나봐. 엄마 번호를 잊다니. 요즘 번호기억하는 사람 없잖아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사님! 듣고 계세요?
나는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형사를 불러제꼈고, 답을 않는 그를 기다리느라 오금이 저렸다.
엄마의 번호를 모르는 딸, 백퍼 의심이 가지 그렇지,
이 사람은 전화를 하다 말고 어디를 갔나 내내
조용했다. 막 둘러대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을까 시커멓게 속이 탔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제보전화를 받을 게 있어서요
그럼 마지막 번호는요?"
그건 정말 모르는 번호였다. 아니다 아는 번호일 수도 있잖은가?
"형사님, 잠시만요. 시간 좀 주세요. 제가 요즘 불면증에 시달려, 좀 헤롱헤롱하거든요. 아아 누구였더라, 누구였더라, 미치겠네."
나는 그 번호를 끝내 맞추지 못했다.
형사는 그 번호가 000 학원으로 나온다고 말했고, 나는 아뿔싸 그건 내가 운영하는 학원번호였던 것이다. 그건 엄마의 번호를 잊어버린 것보다 더 큰 실수였다. 그래서 형사는 나를 끝내는 의심하게 될까. 납치범의 행동반경에 있었는 데다가 전화번호를 두 개나 버버벅 거렸기 때문에? 그것도 너무 뻔한 번호를.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다 말라 있었고, 나는 봉두난발의 피의자처럼 멍하니 거실 한복판에 서서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 것인가? 연쇄살인범 영화는 수도 없이 봤다만, 이런 전화를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이건 리얼이었으니까.영화와 현실 사이엔 이렇게도 괴괴한 강이 흐르고 있었구나 하는 통찰.
"혹시 인근에서 검은 차량에 납치돼 가는 40대 여자를 목격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못 봤는데요!"
틀렸어, 조금 뜸을 들이다 답했어야지. 너무 연출된 거 같잖아 바로 못 봤다고 하면 의심이 가지 않겠니 이 밥통아.
"아. 그게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본 게 없구요, 전 정말 몰라요"
이런 말투는 변명 같고 억측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거 모르니? 아 망했다.
"됐습니다, 됐고요. 실종자 그 현수막은 보셨을 거 아니에요? K 역사 앞에 진작에 걸어놨는데요, 아무튼 나중이라도 생각나시는 거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통화가 끝나는건가, 나는 형사에게 진심을 다해
"네 수고하세요!"
라고 깨발랄 명랑소녀처럼 인사를 한후 전화를 끊었다.
'너무 발랄했나?그냥 저음으로 끊을 걸 그랬나?'
후회의 연속. 이 간장종지만 한 인간.
그리고 얼마 후, 티비에서는 연쇄살인범 검거 소식이 속보로 전해졌다.
그는 S역사 무인지급기에 얼굴이 포착됐고, 그 동선을 검문검색한 경찰들이 체포했다고 했다. 그는 경기남부에서 6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연쇄살인하고 암매장했으며 개농장을 운영했다고 이력이 전해졌다.
나는 그와 함께 찍은 충직한 시베리안허스키의 사진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는 걸 보면서, 저렇게 평범한 얼굴의 인간이 그런 짓을 저질렀구나, 보다도 사진을 찍은 후 그 개를 잡아먹었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