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사진을 보면 빨간 겨울 털부츠를 거꾸로 신고 있다. 눈물이 그렁하고, 입꼬리는 내려가있으며, 머리털은 부스스해, 자다가 대충 옷만 걸치고 끌려 나온 듯보인다. 누가 툭치면 금세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부모님은 아침부터 밤까지 슈퍼를 꾸리느라 바빴다.해서 누군가의 착오로 호적에 숫자하나가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나는 고작 6살에 11월 늦은 생일임에도 영문도 모른 채소집됐다.나는 그나마 이름은 쓸 줄 알았으며 숫자는 10까지 썼고, 받침없는 글자를 읽었지만, 아쉽게도 왼쪽 오른쪽 구분을 못하는 얼뜬 아이였다.
내가 다닌 구암 초등학교는 철벅철벅한 시장통을 어른보폭으로 십분 남짓 걸어야 나왔다.
엄마는 사이렌이 울리고 지붕에 포탄이 한발 떨어져야 '전쟁이군', 하며 무심히 말할 그런 사람으로 쥐방울만 한 딸이 어른들의 실수로, 머리통이 하나쯤 큰 아이들이 있는 정글로 걸어 들어가는일을 별거 아닌 일로 여겼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꼭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전봇대를 잡아라'는 것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특히 그랬다. 나는 키가 108센티에 몸무게는 15킬로였지만, 토네이도 기단이 아닌 이곳에서 날아갈 일은 없었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따라가는가, 교실은 잘 찾아가는가, 아이들에게 괴롭힘은 당하지 않는가 보다 오직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집까지 무사귀환한 걸 기뻐했다.
만화적 상상력이 풍부하고 무한 긍정마인드의 엄마와 달리 나는 몹시 예민한 아이였다.
학교에서 너무 많이 울어, 선생님이 아이를 데려가라고 집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걔는 날마다 운다, 그리고 너무 바빠 학교엘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다.
나는 게다가 느릿느릿 땅바닥을 보고 걷느라 운동장 철봉대에 머리를 수시로 박았고, 오토바이 경적음을 듣지 못해 시장 길목에서 바퀴에 치어 기절하기도 했었다. 고무줄 놀이에 낄 수 있는 순발력이 없어 느티나무 뒤에 종이 칠 때까지 숨어 있기도 했는데, 간혹 이 아이의 등짝은 어리바리한 태도를 참지 못한 선생님의 스매싱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다리가휘청했던 기억. 그리고 어른의 손바닥은 정말 크구나 느꼈던.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시장통 가까이 있던 이 학교는 나를 괴롭히려고 존재했던 게 분명하다.
토요일마다 학급 이동수업을 했는데, 내 역량으로는 겨우 학교에서 시장통을 통과해 걸어오는 그 길만 입력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좀비처럼 토요일마다 이 교실저 교실을돌아다녔고 아득한복도를 응시하며 서 있곤 했다.살금살금 걸어 바로 여기다! 하고 교실문을 열면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 '저 멍청이는 뭔데' 하며 나를 비웃는 거처럼 보였고그때마다 하나뿐인 심장은 시소처럼 풀썩뛰거나 가라앉았다.
신발주머니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거닐다 보며, 교장이나 다른 선생님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아무도 내게 교실을 찾아주지 않았다. 나는 후일 카프카의 '성'을 읽으며 기시감을 느꼈는데 그게 바로 구암초의 미로였던 걸 뒤늦게 알았다.
오전오후 반을 나눠 수업을 했던 그때는 무려 한학급에 아이들이 70명을 육박했다. 코흘리개 70명의 아이들에 선생님들도 기진맥진했을 테지만,신발주머니와 콧물이 동시에 질질 끌리는 이 아이를 좀 도와줄 수는 없었는가, 무척 서운한 대목이다.
여하튼, 교실을 찾지 못해 집으로 되돌아오면 열 시가 넘어 있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뒷집에 사는 취준생 언니에게 부탁해 다시 학교로 보냈다.
어떤 날은......
그대로 학교에 가지 않고 몰래 담장 밑에 숨거나 누렁이의 집에 기어들어갔다. 나는 더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하는 말의 의미와 그들의 태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무서웠다.
우리 가족은 이층 집에 살았다. 물론 이층은 주인이 살았고, 아래 층에는 네모난 마당을 가운데 놓고 다섯 가구가 살았다.그 네모난 마당 귀퉁이엔 누렁이가 살았다. 누렁이는 그해 이름 없는 나그네 누렁이를 잠시 만나 모두 일곱 마리의 누렁이를 낳았다. 아가 누렁이들은 그라데이션의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누렁이었다.
엄마는 누렁이의 집에 커다란 담요를 덮어놨고 누구도 그 앞에 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한달가까이 돼서야 담요가 사라졌고, 아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누렁이도 경계를 푼 채 집 앞에 나와 봄햇살을 쬐었다.
일층 1호 셋집에 사는 고등학생오빠도 마침 마당에 나와 나무 상자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오빠의 얼굴은 회반죽처럼 하얘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너 학교 안 갔니?"
나는 예민한 데다 극소심한 아이로, 오빠가 만드는 판자가 뭐로 변해가는지 궁금했지만 자꾸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다 불쑥
"누렁이 새끼 몇 마리게요?"
라고 물었고 우리 둘은 누렁이와 일곱 마리 새끼들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했던 거 같다.
"그럼 우리 누렁이 아가들 집 만들어 줄까?"
그날 1호 셋집 오빠는 못이 군데군데 박힌 상자를 톱으로 잘라 집모양을 만들고, 거친 나무결을 사포로 밀었으며, 그럴듯한 지붕까지 얹어 누렁이의 세컨하우스를 만들어줬다. 봄햇살이 고드름처럼 마당에 꽂히는 바람에 우린 눈이 부셔서 몇 번 얼굴을 찡그렸었나. 누렁이 일곱마리는 집을 만드는 동안, 오빠와 내 발치에서 몸을 비비고 분홍 혓바닥을 내밀고 재롱을 떨었는데, 톱밥이 날려 새끼들의 혓바닥을 닦아주느라 나는 부산을 떨었다. 엄마 누렁이는 잠시의 휴식이 꿈결 같은지, 새끼들은 나몰라라 엎치락뒤치락 봄을 덩달아 즐겼다.
그때 담벼락을 마주한 남부중앙교회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피아노소리가 흘러나왔다.
녀석들은 날마다 털이 자라고 살이 붙어 일곱 마리 중 한두 마리만 1호 셋집 오빠가 만든 집에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꼬물이들이 커갈수록 나도 조금씩 자랐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난 이동학급을 시간 맞춰 찾았고 앞자리에 앉은 애가 오줌을 싸면 조용히 두발이 젖지 않게 들고 앉는 요령도 생겼다. 여전히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못했고 땅을 보고 걸었으며 덧셈 뺄셈에 약한 아이였지만, 집에 가면 누렁이들을 겨드랑이에 낀채 방에 들어와 몰래 아이들을 이불 밑에 넣고 토닥토닥 재웠다. 저녁에 마당에 나가면 1호 셋집 오빠는 매일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말라서, 허수아비 같았던 오빠가, 누렁이 한번, 나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던, 다정했던 밤.
토요일이었다. 학교에서 종이 치자마자 집으로 뛰어왔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고 있었다.뿐더러 그날 대문 안에는 누렁이들 뿐 아니라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사람, 게다가 대문밖에는 점멸등을 켠 경찰차까지 있었다. 1호 셋집을 제외한 네 가구의 셋집 사람들이 나와 너나없이 1호 셋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왜 이런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이미 마당 가득 불온한 공기가 떠다니는 중이란 걸 나는 직감했다.
마이크를 든 기자는 누렁이들을 요리조리 피해 마당을 질러 1호 집 현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누렁이가 사람들을 향해 악을 쓰며 짖었고 하울링을 했었나. 너무 시끄러워 나는 귀에 물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기자가 카메라 앞에서 한 그게 무슨 소리인지 그땐 잘 몰랐다. 밤에 엄마가 누렁이들에게 밥을 넣어주며 눈물을 훔친 그 순간에야 비로소 바로잡을 수 없는 불행이 이곳에 들이닥쳤단 걸 알았다.
엄마는 시간이 흘러 1호 셋집오빠가 몸이 아파 학교를 다니지 못한 데다, 1호셋집 모자가 하필 그날 나들이를 갔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담담히 말해주었다.
처음 맞닥뜨린 죽음이란 게 내겐 몹시 애매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누렁이새끼들과 그가 만들어준 집은 그대로 있는데,그리고 밤에 줄넘기도 했는데......
1호에 사는 사람들만 흔적없이 사라졌다는 게, 나는 너무 이상했다.
한동안 난간에서 추락하는 택시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엄마와 대중탕에 가서 온탕에 빠졌을 때도 1호 오빠를 생각했다. 내키가 작았지만 충분히 똑바로 서면 겁먹지 않을 탕 속, 수위였음에도 나는 겁을 먹고 첨벙 대느라 더러운 물을 꺽꺽 마셔야만 했다.
누렁이들은 그해 가을, 동네사람들의 집으로 한 마리씩 떠나갔다.
녀석들이 떠나간자리엔 1호 셋집 오빠의 개집만이 남았다. 엄마는 여름 장마에 지붕이 무너진 그 집을 치웠고 그자리에 작은 울타리를 쳐 닭 한마리를 키웠다. 이웃들이 냄새난다고 싫어했음에도 엄마는 닭을 잘키워냈다.
그닭은 내가 학교 앞에서 사온병아리였는데,중닭이 돼, 서울 시민들의 새벽을 깨우기까지 하는 마법을 보여줬다. 그러나,누렁이는 집 밖을 거의 나오지 않고밥 먹을 때만 얼굴을 비추다가 그해,닭보다 빨리 죽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봄바람, 햇살, 누렁이의 착한 눈두덩, 어미젖을 물고 빨던 일곱 마리 누렁이들, 1호 오빠의 뽀얀 얼굴 그가 강아지집을 만들 때 쾅쾅 못을 박던 풍경, 그때 바람에 엉클어졌던 머리칼, 1호 셋집 엄마가 라면끓여놨다고 오빠를 부르던 목소리, 라면냄새, 그리고 집으로 기어들어가던 보드랍던 꼬물이들이 진짜 실제했던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없지만 그 네모난 그 마당에서 난 언니 동생과 누렁이들을 씻기고 목마를 태우고 비오는날엔 우산으로 집에 차양을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우린 비가 그친 어느날 각자의 이름을 딴 누렁이들을 두 마리 씩 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사진이, 내게 한 장있다.날이 흐려 사위가 어두운데 우리 셋은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고 있다. 그 뒤로는 1호 오빠가 만든 집이 보이고 옆엔 엄마가 김치를 담글 때 썼던 빨간대야가 놓여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진을 앨범에서 찾지 않을 작정이다.
그냥 내 머리에, 잘 넣어놨으니 됐다.
내 특출한 기억능력(정말 그렇다) 때문에 나는 종종 허무했고, 하여 가끔은이빨을 닦거나 빨래를 개다가 울었던 전력이 있음으로, 이곳에 기록하며 갈음하기로.
가끔은
어벤져스 엔드게임도 아니고.
이렇게 모조리 사라져버릴 건 뭐람. 사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의 연속이란 성찰.
1호 셋집 오빠도 내 언니와 동생도, 그리고 누렁이와 그의 아이들도 모두가 호시절이었던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