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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01. 2023

[D-275] 흔적을 남기는 법

91번째 글

어릴 때 나는 특별한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유명해지고 싶었고, 아주 큰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인류에 기여하고 싶었고, 세상을 바꾼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기억되기를 바랐다. 수십억 명의 사람들 중 단 한 명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나를 알 수 있기를 소망했다. 나는 위대해지고 싶었다.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비욘세의 노래 'I Was Here'의 가사처럼.


I wanna leave my mark so everyone will know
I was here
I lived, I loved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
모두가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내가 살았고, 사랑했다는 것을.

- 비욘세, 'I Was Here' 중에서


내가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는 일. 유산을 남기고 떠나는 일. 나는 이런 것들에 집착했었다. 단순히 명성이나 부에 대한 추구는 아니었고, 오로지 자만심 때문이기만 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린아이다운 오만함과 나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어느 순간 내가 그렇게까지 특별하지 않다는 깨달음이 찾아오자 오만함은 좀 사그라들었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나는 흩어지고 싶지 않았다. 수십억 명 중 하나, 잊히기 쉬운 사람, 죽고 나면 그냥 사라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고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보잘것없기에, 너무나도 쉽게 흩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내 이름을 기념비에 새기고 싶었고 역사책에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위대해지고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또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위대해질 수는 없으리라는 깨달음 말이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내 시간과 내 삶은 제한되어 있으며, 나는 단지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버거워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우울감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다면,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과연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이 삶의 의미가 과연 존재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우울과 허무에 잠겨 지냈다. 그리고 삶이 점점 무거워져서, 때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세 번째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위대해질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이걸 깨닫고 나자 삶의 의미 같은 건 구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내 일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친절하게 살아가는 일,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베푼 친절과 사랑으로 기억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흔적을 남기는 일'은 사실 기념비나 트로피나 역사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매일 소소하게 나눈 작은 사랑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친절이, 내가 맡은 일을 책임지고 열심히 해내는 성실함이, 나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겨 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것들이 나를 기억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들고 세상을 변화하게 만든다. 늘 그렇듯이 내가 집착과 걱정을 버리자 마법처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

2023년 4월 1일,

침대에 기대앉아서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며.



*커버: Image by Jacques GAIMARD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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