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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20. 2023

[D-256] 유머의 역할에 대해서

110번째 글

요즘 심심할 때 넷플릭스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하나씩 보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부담 없이 틀어놓을 수 있어서 좋다. 일단 길이가 대략 1시간 정도로 짧은 데다가 형식도 단순해서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몰입해서 봐야 하는 줄거리도 없고 각 잡고 봐야 하는 화면 연출이나 효과도 없고 그냥 무대에서 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떠드는 것이 전부라서 더 편하게 볼 수 있다. 내용도 재치 있는 입담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가볍게 즐기기 좋다. 그러다 보니 혼자 밥을 먹거나 운동을 할 때 스탠드업 코미디를 틀어두게 된다.


그렇게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나씩 섭렵해 나가면서 유머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왜 우리가 굳이 농담을 던지고 익살을 부리고 해학을 즐기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유머는 웃음을 유발한다. 유머는 유쾌하다. 유머는 즐겁다. 유머는 긴장을 풀어 준다. 유머는 상황을 심각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유머는 모든 것을 가볍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머는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슬픔과 괴로움의 갈대밭을 헤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런 유머의 효과를 나 자신의 상황에도 약간씩 적용해 보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서 나 자신의 상황을 희화화시켜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오늘 나는 힘든 아침을 보냈다. 새벽에 일어나서 필라테스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지친 걸음으로 비척비척 돌아왔다. 내가 워낙 근육도 부족하고 체력도 약하고 몸도 굳어 있어서 필라테스 수업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고통이었다. 몸이 아픈 것보다도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건강하지 못한 내 몸에 대한 걱정, 그동안 내 몸을 돌보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미움과 후회, 왜 이 정도밖엔 못 하는지 질책하는 마음 등으로 괴로웠다. 건강을 되찾기까지 멀고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아서 막막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심란한 마음으로 힘겹게 집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내 상황을 스탠드업 코미디로 재구성해 보았다.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요즘 스탠드업 코미디를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마이크를 잡고 무대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이렇게 넷플릭스 자막 투로 말하는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나도 이제 운동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몸으로 더 살다가는 어느 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육이 너무 없어서요. 그냥 녹아버리는 거죠. 아무튼, 그래서 저는 헬스장에 가서 선생님한테 매달렸어요. "제발, 저 좀 녹아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 저를 올라프의 운명으로부터 구해주세요!" (관객 웃음)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하더라고요. "아, 네, 그러면 필라테스를 해 보죠." 진짜야? 저는 제 목숨을 구해 달라고 했는데, 필라테스 하나로 그게 된다고요? 거저먹기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평생 혹사해 온 내 몸을 구원하는 데에 필라테스로 된다니. 완전 누워서 떡 먹기 아니야?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까 정말... 고통스럽더라고요. 정말로요. 여러분. 제가 여기서 하나 말씀드릴게요. 필라테스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워요.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라고요. 시속 200km로 날다가 절벽에 부딪혀서 박살나는 고통보다도 필라테스가 더 아플 거예요. 장담할 수 있어요. 적어도 그건 빨리 끝나기라도 할 테니까요. 반면에, 필라테스는 느리게 고통을 맛봐야 하죠. 막대 사탕을 빨아먹을 때처럼 고통을 음미하면서요. 이제 끝났나 싶으면, "회원님, 한 세트만 더요!" (관객 웃음) 네, 맞아요. 고통이죠. (객석의 관객 한 명을 가리키며) 필라테스 해 보셨어요? (관객: 아니요.) 하! 아직 인생의 쓴맛을 덜 보셨네. 살다가 인생이 너무 아름답고 찬란하고 반짝이로 가득 차서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가서 필라테스를 한번 해 보세요. 반짝이는 그날로 안녕일 테니까. 여러분, 진지하게, 필라테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저는 어제도 필라테스를 했는데요. 말 그대로 기어서 집에 돌아왔어요. 패잔병처럼 비틀거리며 집에 걸어 돌아왔죠. 고작 1시간을 스트레칭을 했을 뿐인데 인생에서 패배한 사람이 됐다고요."


이런 식으로 내 모습을 코미디 쇼로 만들어 버리자, 지금 내가 느끼는 피로와 막막함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재밌는 일화처럼 느껴졌다. 미래의 어느 날,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웃으면서 꺼내 놓을 수 있는 재밌는 일화 말이다. 그러자 부담은 가벼워지고 자책은 줄어들었다. 멀고 험하기만 해 보였던 앞날도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바로 유머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유머는 희화화를 통해 위로와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유머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우습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만 살면 가끔씩 인생의 무게가 감당이 안 될 때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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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0일,

식탁에 앉아서 창 밖 소음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Matthias Wagner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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