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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y 25. 2023

[D-221]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

145번째 글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 목적지도 목표도 일정도 아무것도 없는 여행을. 아무것도 정해 놓지 않고 짐도 별로 챙기지 않고 딱 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여행을 떠나는 거다. 그냥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고 싶다.


원래 나는 여행을 갈 때 아주 세세하게 계획을 세우는 타입이다. 플랜 B, 플랜 C까지 다 꼼꼼하게 챙겨 놓고 엑셀에 일정이며 시간표, 할 일, 주의사항, 기타 알아야 하는 내용들을 정리해 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틀어지더라도 바로 다음 계획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요즘은 이렇게 할 체력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조금 덜 계획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나는 계획을 열심히 세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요새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일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냥 어디론가로 떠나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계획을 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세우고 떠나고 싶다. 숙소는 물론이고 가야 할 장소와 교통편까지 아무것도 정해 놓지 않고 되는대로 흘러가도록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뭔가 멋진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렇게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다녀왔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일종의 해방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을 해 보다 보면, 걱정도 되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마음이 후련할 것도 같다.


아직까지는 결심이 서지 않았지만, 다음엔 꼭 한번 즉흥 여행을 떠나 보고 싶다. 언제 떠나야겠다는 계획조차 세우지 않는다. 그냥 어느 날 아침, 내가 오늘 별로 할 일이 없으면, 그럼 그냥 떠나기로 결심하는 거다. <호빗>에 나오는 빌보 배긴스처럼. 빌보가 "저는 모험을 떠나러 갑니다!(I'm going on an adventure!)"라고 외치면서 마을을 달려 나갔듯, 나도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달려 나가서 떠나면 된다. 그렇게 떠나서 공항이나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로 갈 것이다. 남은 티켓 중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티켓을 아무 거나 사고 그 티켓이 이끄는 목적지로 갈 것이다. 가방에 든 거라고는 지갑과 핸드폰과 이어폰뿐이지만 상관없다. 필요한 건 도착해서 사면 되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조금 불편하게 지내면 되고. 또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한두 시간 정도 도착지에 앉아 있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 다 그냥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 내 마음대로 떠난 모험이니까.


어쩌면 내 삶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찾고 싶어서 이런 즉흥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 수도 있다. 일상을 뒤로하고 떠나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충동적인 선택을 매 순간 내리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상관없다. 그냥 여행을 떠나고 싶다. 계획해서 떠나는 휴가가 아닌, 정말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모험에 가까운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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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5일,

식탁에 앉아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Nate Johnsto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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