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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07. 2023

[D-359] 이왕 나가는 김에

일곱 번째 글

집순이들에게는 한번 외출을 하는 일이 아주 큰일이다. 그래서 집순이들은 밖에 나가는 김에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는 습성이 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길에 쓰레기도 버리고 은행도 들르고 서점도 갔다가 장도 보고 커피도 테이크아웃해서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집순이들에게는 동선을 짜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처리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일의 순서와 움직이는 동선을 잘 계획해야만 하는 거다.


내가 이렇게 집순이의 습성을 잘 아는 이유는,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꺼번에 모든 일을 싹 처리하고 오는 것과 동선 짜는 것에 집착하는 집순이다.


오늘도 이왕 밖에 나가는 김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 하려고 어제부터 열심히 동선을 짰었다. 오늘 연극을 보려고 미리 티켓을 예매해놨는데 연극만 보고 오기는 좀 아쉬워서. 내가 세운 계획은 대강 이랬다. 새벽에 나가서 조조로 영화를 본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10시가 좀 안 되는데, 미술관이 10시부터 여니까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미리 예쁜 카페도 다 찾아 놨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보고 싶었던 전시를 관람한다. 다 보면 점심을 간단히 먹고, 연극을 보러 간다.


조금 빡빡하게 짠 것 같기도 하지만 평소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는 거라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 계획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완전히 틀어졌다.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잤기 때문이다. 10시가 되어서야 눈을 뜨고 화들짝 놀라면서 깼다. 원래 나는 아침잠이 없는 스타일이라 일찍 잘 일어나는 편인데, 어제 잠이 잘 안 와서 늦게 잠들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훨씬 늦게까지 자 버렸다.


낭패였다. 이미 영화와 카페는 스킵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전시도 여유롭게 보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냥 오후에 나가서 연극만 보고 오기로 계획을 바꿨다. 사실 오늘 꼭 해야 하는 것은 연극을 보는 것뿐이었고, 전시는 다음에도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바쁘게 여러 일정을 소화하는 대신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기로 선택했다. 침대에 좀 늘어져 있기도 하고, 게임도 좀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이왕 나가는 김에 뭔가를 꼭 더 할 필요는 없다. 가끔은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돌아오면 된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집에 왔다고 해서 그 외출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다 해내려는 강박과 집착 때문에 더 피곤해질 수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고 가뿐한 맘으로 돌아와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오늘 늦게까지 잘 자서 피로가 풀려서 개운했다. 평온하고 따뜻하게 아침을 보내며 즐거웠다. 시간에 쫓기며 촉박하게 돌아다니지 않고, 여유롭게 집을 나서서 공연장을 찾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일찍 티켓을 찾고 로비에 앉아서 텀블러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때로는 그냥, 그렇게 모든 걸 한꺼번에 다 처리하려 들지 말고, 느긋하게 할 일을 하고 돌아와도 괜찮다.



/

2023년 1월 7일,

연극을 보러 와 공연장 로비에 앉아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Jan Lüddeman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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