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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28. 2023

[D-187] 인생 익힘책

179번째 글

초등학생 때 수학 시간에는 교과서가 두 권이었다. 수학책과 수학 익힘책. 수학책은 개념과 원리, 공식 등을 배우는 용도였고 수학 익힘책은 그렇게 배운 개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수학 문제를 직접 풀어 보는 용도였다. 그래서 보통 수업 시간에는 수학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수학 익힘책의 문제들을 다 풀어 오는 것을 숙제로 내주셨던 기억이 난다. 수학책에서 본 개념들이 알 듯 말 듯 헷갈려도, 차분히 앉아서 익힘책을 풀며 숙제를 하다 보면 조금씩 이해가 되고 익숙해지고 체화가 되었었다.


얼마 전, 친구와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수학 익힘책이 대화 주제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친구는 수학 '익힘'책이라는 이름이 정말 잘 지은 이름인 것 같다고 했다. 수학을 배우는 것은 수학책을 통해서 했지만, 수학을 익히는 것은 수학 익힘책을 통해서 할 수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어떤 것을 습득하는 일은 대체로 이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배움과 익힘. 배우고 나면 익히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익히기 전에는 제대로 배워야만 한다. 수학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피아노도 그렇고, 자전거도 그렇고, 업무도 그렇다. 또 인생도 그렇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라고 하는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 인생은 배움과 익힘의 연속이다. 배우기만 하면 지식과 경험은 흘러가 버린다. 익히는 과정이 뒤따라야만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수학 익힘책처럼, 인생 익힘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학 문제를 하나씩 풀다 보면 개념을 깊이 이해하게 되듯이, 공식을 자연스레 암기하게 되듯이, 그래서 나중에는 애쓰지 않아도 쉽게 정답을 적을 수 있듯이, 인생에도 익힘책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인생 익힘책의 문제들을 하나씩 풀다 보면 이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내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전부 알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은 낯설고 어려운 일들로 가득하다. 인생의 모든 것이 전부 다 처음 겪는 것이다. 이 인생을 미리 경험하고 미리 익숙해져서 정답을 아는 상태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서지거나 상처받지 않고도, 겁을 내거나 걱정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매지 않고도,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학 익힘책처럼, 인생에도 익힘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을 함께 보낸 오랜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
2023년 6월 28일,
소파에 앉아서 TV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Chris Liverani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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