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Aug 23. 2023

[D-131] 상실에 대하여

235번째 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것과 다시 마주할 확률이 0에 가까운 숫자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어? 혹시?'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겠지.'라고 확신하는 상황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우리 집과 할머니 댁은 걸어서 5-10분 거리였기 때문에 주말이면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할머니 댁에 놀러 가기도 했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동네를 걸어 다니다가 키가 작고 마르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나이 드신 할머니를 보면 '혹시 우리 할머니인가?' 싶어서 멀리서부터 자세히 보면서 걸어오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모르는 할머니였지만 때로는 정말로 우리 할머니였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저기 걸어오는 저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일 가능성을 늘 생각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은 안다. 저기 걸어오는 저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는 걸. 키가 작고 마르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우리 할머니처럼 보이는 분이더라도, 절대 우리 할머니는 아닐 거라는 걸. 이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혹시 우리 할머니인가?'를 생각한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 두 달밖에 안 되어서인지 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아직 낯설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할머니를 마주치는 상황을 다시는 겪을 수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우리 엄마는 눈물이 없으신 분이다. 감정이 메말랐다고 가족들이 엄마를 놀릴 만큼, 건조한 감정선과 마른 눈물샘을 가지신 분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식에서 엄마는 거의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정신이 없는 데다가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서 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뒤, 엄마는 지하철을 타려고 역으로 들어가시다가 외할아버지와 닮은 뒷모습을 한 어떤 노년의 남자분을 보고 펑펑 우셨다고 했다. 생전의 외할아버지처럼 키가 크고 중절모를 쓰고 희끗한 머리를 빗어 넘기고 양복을 차려입은 그 뒷모습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고. 너무 닮으셔서 '혹시 아버지인가?'라고 문득 생각했다가, 그게 아버지일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울음이 쏟아졌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제야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셨다고 말이다.


상실이란 그런 것이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예전에는 일어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예전에는 마주칠 수도 있었던 사람을 더 이상은 마주칠 수 없다는 것. 상실이 이런 것인 줄,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상실을 경험하게 될까. 얼마나 더 많이 '아니겠구나.'를 느끼게 될까. 내가 그 경험과 감정들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

2023년 8월 23일,

소파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Мария Волк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132] "132일 뒤에는 뭘 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