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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ug 24. 2023

[D-130] 가면을 쓴 사기꾼

236번째 글

나는 내가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지를 종종 떠올린다. 내가 하는 일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얼마나 운으로 가득한지를 말이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정말 지지리도 운 좋은 사람이구나.' 상황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진짜 운 좋은 사람이다.' 내가 뭔가를 이루어냈을 때도 나는 생각한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나는 이렇게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행운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내가 거둔 성공조차도, 내가 해낸 성취조차도 모두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치부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감사하고, 또 언제나 불안해한다. 다음번에는 운이 따르지 않을까 봐. 다음번에 운이 없으면 내 형편없는 실력이 모두 까발려질까 봐. 내 실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운 좋게 누리고 있었다는 진실이 밝혀지게 될까 봐. 내가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까 봐.


이런 사고 흐름을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스스로를 가면을 쓴 사기꾼이라고 느끼게 되는 심리이다. 나는 원래 자격이 없는데, 운이 좋아서 또는 다른 사람들을 기만해서 지금의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래서 언젠가 이 가면이 벗겨져서 스스로의 실체가 드러나게 될까 봐 불안해하는 것. 나는 언제나 이런 불안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불안감이 없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이고, 이렇게 운에게 공로를 돌리는 것이 겸손한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는 겸손하게 "운이 좋았어요."라고 말하며 뒤에서는 더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아리아나 드보스의 인터뷰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뮤지컬 <해밀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 아리아나 드보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아니타 역으로 2022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등을 휩쓸며 스타덤에 올랐다. 여러 시상식에 참석하고 수상자로 호명되어 트로피를 거머쥐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아리아나는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린 거라는'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거나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칭찬을 받는 거라고 느꼈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아리아나는 이런 생각들이 결국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스스로에게 자신감 있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아니, 이건 실수가 아니야.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야. 나는 열심히 일했고 이럴 자격이 있어. 그리고 이 모든 게 내일이면 전부 끝이 난다고 해도 괜찮아. 이 화요일은 정말 멋졌으니까."


아리아나의 인터뷰를 보고 나는 나 역시 그동안 스스로를 고문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가 자격 미달이라고 느끼고 불안해하는 이 심리는 겸손한 게 아니라 자신감이 부족한 거였다는 사실을. 그저 나 자신을 학대하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에 시달리고 나 자신을 괴롭히느라 정작 정말로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 정말로 더 발전시키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이런 감사와 노력 대신 불안과 걱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아리아나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었어!"라고. 그냥 내게 주어진 이 성취를 즐기고 감사하는 데에서 그치기로 했다. 더 깊이 들어가서 내가 이럴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하며 불안에 떨지 않기로 했다. 만약 정말로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해도, 이 모든 성취가 단순히 착오에 의한 것이었어도, 그래서 내일이면 모든 진실이 까발려지고 내 민낯이 드러나게 된다고 해도, "그래도 어제는 멋진 날이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먹기로 결심했다. 



/

2023년 8월 24일,

식탁에 앉아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Llanydd Lloyd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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