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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ug 25. 2023

[D-129] 오늘은 이래서 내일은 저래서

237번째 글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라면이 먹고 싶었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그 중독성 있는 냄새를 맡고 싶었고, 꼬들꼬들한 면을 후루룩 삼키고 싶었고, 뜨끈한 라면 국물을 그릇째로 들이켜고 싶었다. 딱히 먹고 싶은 이유는 없었다. 원래 무언가가 갑자기 먹고 싶어지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고 갑자기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어제 저녁에 치킨을 먹어서 속이 조금 느끼하다 보니 라면 국물 같은 적당히 맵고 칼칼한 게 땡겼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어쨌거나 무슨 이유에서건 상관없이 나는 오늘 라면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원래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면 요리 중에서는 걸쭉한 파스타 종류를 가장 좋아하고, 그다음으로는 동남아 스타일의 볶음면을 좋아하고, 그다음으로는 쌀국수나 잔치국수 같은 맑은 국물의 면을 좋아한다. 라면의 선호도는 저 뒤에 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 거의 없다. 누군가 먹자고 하거나 다른 사람이 끓여 준다면 맛있게 먹지만 굳이 내가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라면을 먹어서 행복했다. 나는 파스타를 좋아하지만 오늘 라면을 먹었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았다. 나는 파스타를 먹을 때는 파스타를 먹어서 행복하고, 라면을 먹을 때는 라면을 먹어서 행복하다. 파스타를 먹을 때도 맛있다고 느끼고 라면을 먹을 때도 맛있다고 느낀다. 오늘 저녁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해서 그걸 먹었다고 해도 나는 맛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선호도의 차이는 내가 식사를 할 때 만족도의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많이 있다. 오늘은 이래서 즐겁고 내일은 이래서 즐거운 경우. 나는 갓 튀겨져 나온 바삭한 치킨을 좋아하지만 한 번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튀김옷이 눅눅해진 치킨도 좋아한다. 그 눅눅한 튀김옷만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전날 시켜 먹은 치킨이 다 식었을 때, 다음 날에 먹는 그 치킨도 참 맛있다. 그 치킨을 먹을 때 나는 불행하지 않다. 치킨이 따끈따끈하고 바삭하지 않다고 해서 맛없다고 느끼고 속상해하지 않는다. 어제의 치킨은 바삭해서 맛있었고, 오늘의 치킨은 눅눅해서 맛있다. 어제의 치킨은 따뜻해서 맛있었고, 오늘의 치킨은 식어서 맛있다. 서로 다른 맛이지만 나는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다.


행복의 조건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오늘은 이 음식을 먹어서 좋고 내일은 저 음식을 먹어서 좋은 것이 행복이다. 오늘 나쁜 일이 있었어도 그 일이 다 지나갔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가 있고,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났어도 이 일을 상쇄시킬 더 나쁜 일이 닥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불행할 수가 있다.


그래서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똑같이 눅눅한 치킨을 먹어도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불행할 수 있는 것이다. 눅눅한 치킨을 먹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면 그 순간 나는 불행해진다. 눅눅한 치킨도 별미라고 느끼고 맛있게 먹으면 그 순간 나는 행복해진다. 늘 똑같은 완벽한 하루를 기대한다면 나는 불행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오늘은 오늘대로 내일은 내일대로 제각각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간다면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 기대에 맞든 그렇지 않든, 일상 속에서 삶의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하나씩 경험하며 각기 다른 행복들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말이다.



/

2023년 8월 25일,

침대에 엎드려서 음악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Olayinka Babalol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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