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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ug 27. 2023

[D-127] 지갑을 잃어버렸다

239번째 글

지갑을 잃어버렸다. 말 그대로다. 나는 그그저께인 목요일에 지갑을 잃어버렸고 그 사실을 어제 저녁이나 되어서야 깨달았다. 금요일에는 내가 재택근무를 했고, 헬스장은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라 지갑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지갑이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당연히 가방 속에 있을 줄 알았는데 가방은 텅 비어 있을 때의 기분이란. 다른 곳에 꺼내 놓았을 수도 있어서 집 안을 한번 뒤집어엎어 보았는데도 지갑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택시에서 흘렸거나 목요일에 갔던 야구장에서 잃어버린 것 같다. 택시 기사님께 연락해 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야구장 분실물 센터와 지역 경찰서들을 찾아보았는데도 내 지갑과 비슷한 건 찾지 못했다. 아마 찾지 못할 것 같다. 그 안에 내 신분증과 카드, 연락처가 적힌 명함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운 좋으면 마음씨 좋은 누군가가 주워서 내게 돌려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아예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동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내가 원래 지갑을 새로 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의 7, 8년 정도 오래 쓴 지갑이라 많이 낡고 지저분해졌고 귀퉁이도 닳아서 지갑을 바꿀 때가 되었나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나는 원래 새 물건을 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데다가 쇼핑을 귀찮아한다. 그리고 좀 오래되긴 했어도 아직은 쓸 만 한데, 조금 더 쓰고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선물 받은 지갑이라 바꾸는 게 내키지 않는 마음도 있었고. 하지만 볼 때마다 지갑의 닳은 부분이나 곧 고장 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지퍼 같은 것들이 거슬려서 지갑을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긴 들었었다.

그러다 지갑을 아예 잃어버린 덕분에 나는 더 이상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젠 좋든 싫든 지갑을 새로 사는 수밖에 없다. 지갑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우주는 가끔씩 이렇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 더 이상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뭔가 중요한 계기가 있어서 마음을 먹으면 지갑을 새로 사겠거니 싶었는데 정말로 지갑을 새로 살 수밖에 없는 중요한 계기가 만들어졌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끔씩 우주는 코딩이 잘못된 프로그램처럼 작동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알고리즘에 뭔가 문제가 생기긴 했는데 어쨌든 원하는 아웃풋을 뱉어내기는 하는 것이다. 아니면 트레버 노아가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말했듯이, 우주는 못된 장난을 치기 좋아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와 같이 돌아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에 벌레가 안 나오게 해 달라는 소원을 말하면, 이 사악한 지니는 "집 안에 벌레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알았어." 하고 대답하고는 집 안에 거미들을 잔뜩 풀어놓는다. 거미들이 벌레를 모두 잡아먹어서 집 안에 벌레가 안 나오는 것은 맞는데, 문제는 이제 내 집에는 거미가 우글댄다는 거다. 지니에게 항의하면 이 지니는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그렇지만 벌레는 안 나오잖아? 너는 그냥 벌레를 없애 달라고 말했지, 방법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다고."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십 마리의 거미들과 함께 남겨져 버리고 만다. 우주는 때로 이렇게 나를 골탕 먹이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그게 우주의 작동 방식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 나는 이제 그냥 새 지갑을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 된다. 왜 잃어버렸는지를 곱씹으며 자책하거나, 한숨만 내쉬거나, 투덜거리는 것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대체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그러지? 다음에 얼마나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하길래 지금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린 거야?"라고.



/

2023년 8월 27일,

지하철역에 앉아서 열차를 기다리며.



*버: Image by Joel Lee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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