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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ug 31. 2023

[D-123]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243번째 글

지금의 나는 전보다 나아졌다. 많은 부분에서 훨씬 더 발전했고 훨씬 더 성장했다. 그건 사실이다. 직업적이나 사회적인 부분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들 말고도 나는 전보다 더 자랐다. 나의 마음도 더 넓어졌고 내면이 더 깊어졌다. 전보다 덜 예민해졌고, 살아가는 방법도 더 많이 익혔다. 그래서 예전에는 마음이 얕은 계곡에 휘몰아치는 물살처럼 거세게 흘러갔다면, 요즘은 강물처럼 비교적 잔잔하게 흘러간다. 홍수를 막기 위해 강바닥을 파내고 강폭을 넓히듯이, 나도 마음을 더 파내고 넓혔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해서 확실히 더 나은 사람이다. 그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그 강바닥에 내가 가라앉는 듯한 기분에 잠긴다. 상류에서부터 흘러온 모래와 돌들이 어느 순간 강에 가라앉듯이, 깊이 침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뾰족뾰족한 돌들이 가라앉아서 나를 찌르고 있다. 그런데 그 돌들은 나다. 내가 깊숙이 가라앉아서 나를 찌르고 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우울한 기분에 빠지면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나를 울적하게 한 원인 자체가 아니라, 나아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는 비참한 깨달음이다. 이만큼 땅을 파서 물줄기를 넓혀 놓았으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것. 나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다 끝난 문제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내 그 문제를 품고 있었다는 것. 해결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숨겨 놓았을 뿐이라는 것.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달라진 게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리고 최악의 지점은 나의 이 생각이 많고 예민하고 방어적인 성격 때문에 자꾸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무던하지 못하고 날이 서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다는 것. 이제는 내가 더 나아져서 그렇게 상처 주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또다시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 삶을 다시 한번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이 부분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 미래의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진 미래의 나도 어느 순간에는 똑같이 우울에 잠겨 마음의 강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는 호수나 바다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넓어지고 그렇게나 깊어졌는데도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잔잔히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호수도 사실은 흐르고 있고, 드넓은 바다에도 파도가 치니까. 그러니 지금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래의 내가 돌아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수는 없다. 바닥을 발로 차고 허우적거리며 위로 올라가야 한다.



/

2023년 8월 31일,

책상에 앉아서 거실에서 들리는 TV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Emma Harper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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