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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01. 2023

[D-122]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

244번째 글

나는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를 위한 결정은 잘 내리는데, 내 결정에 다른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한없이 우유부단해진다.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 이번 주말에 어딜 놀러 갈까 같은 아주 사소한 선택이라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다 좋다."라던지 "나는 어디든지 괜찮다."라는 말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것을 다른 사람의 몫으로 떠넘기곤 한다.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리도록 선택지를 내미는 것을 그동안 나는 배려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렇게 "나는 다 좋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맞춰 줄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 그 사람은 별로 안 내킬 수도 있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에 그 사람은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결정을 내려 버리면 그 사람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상대방을 위해서 결정을 미루곤 했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따르곤 했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거라면 내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아도 그냥 같이 해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까지 이게 친절이라고 생각했고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배려가 아니라 회피였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려 했던 건, 나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 했던 건, 결국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정의 결과를 내가 책임지기 싫어서 회피했던 거였다. 예를 들어 오늘 점심에 새로 생긴 식당에 가서 돈가스를 먹자고 내가 결정했는데, 그 식당이 맛은 없고 터무니없이 비싸기만 하다면 모두 실망하게 될 것이다. 블로그에서 본 어느 박물관이 좋다고 해서 친구에게 함께 가 보자고 했는데, 정작 가보니 별로 볼 것 없고 사람만 많아서 별로였다면 우리는 실망한 채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실망에 대한 책임을 지기가 싫었던 것이다. 내가 내린 결정, 내가 한 제안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결정으로 인해서 내가 원망과 미움을 받게 될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나의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성향'은 결국 배려가 아니라 책임 회피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욕심이었다.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라 교묘하게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동안은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이런 의미라는 것을.


의견을 내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법.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내 의견도 존중받도록 하는 법. 내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법. 결정을 내리고 나서 그 결정이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는 법. 언제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 이런 연습을 해야겠다. 자기주장을 하고 결단력을 갖출 수 있도록.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거짓 배려가 아닌, 진짜 배려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

2023년 9월 1일,

버스에 앉아서 에어컨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Jacopo Mai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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