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Oct 09. 2023

[D-84] 믿어야 사는 사람

282번째 글

약 2주간으로 계획했던 뉴질랜드 여행이 이제 절반 정도 지나갔다. 이번 여행은 처음 일주일은 남섬에서 투어를 하며 자연을 즐기고, 나머지 일주일은 북섬의 오클랜드에서 머무르는 스케줄이다. 나는 어제 낮에 남섬 투어를 마무리하고 다시 국내선에 올라 저녁 즈음에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확실히 이곳은 넋이 나갈 듯한 자연경관을 사방에 두르고 있던 남섬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람도 훨씬 더 많고, 높은 건물도 더 많고, 여행객보다는 거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느낌. 전반적으로 '도시'라는 인상이 강한 곳이다.


상대적으로 시골 분위기인 남섬에서는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건 물론이고 로밍조차 잘 되지 않는 곳들이 꽤 있었다. 거리도 아기자기한 느낌이었고 상점들도 자그마했고 파는 물건의 가짓수도 적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는 도중에 필요한 물건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도 그걸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어서 없는 채로 다녀야 했었다. 또 남섬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짧은데 볼거리는 많아서 아주 촉박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마음 놓고 뭔가를 사러 다니거나 찾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매일 밤 뉴질랜드의 와인과 치즈를 즐겨 보겠다던 야심 찬 포부가 있었지만 그날의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씻고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짐을 들고 다니며 계속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짐이 무거워질까 봐 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는 그렇게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구할 수가 없을 때마다, 또는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었다. "오클랜드에 가면 있을 거야." "오클랜드에 가면 할 수 있을 거야." "오클랜드가 물가가 더 싸다니까 거기서 더 싸게 더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오클랜드는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되어 갔다. 무엇이든지 오클랜드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믿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어쩌면 그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찾는 물건이 오클랜드에 없을 수도 있고, 오클랜드에 가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고, 뉴질랜드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오클랜드에 가면~"이라고 이야기하며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오클랜드에 희망을 걸었고, 기대를 걸었고, 믿음을 걸었다.


우리가 그랬던 이유는 믿을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믿어야 더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는 믿을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믿음을 가져야만 살아갈 수가 있다. 그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던,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던,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던, 도덕이나 윤리 관념에 대한 믿음이던, 사회에 대한 믿음이던, 어떠한 신념에 대한 믿음이던, 미래나 희망에 대한 믿음이던,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이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계속 살아가게 한다. 믿음은 버팀목이 되어 준다. 믿음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고 우리를 생존하게 만든다. 믿음은 비관과 냉소로부터 우리를 지켜 준다.


오클랜드에 도착하고 난 뒤에 어떤 일들은 우리가 믿었던 대로 이루어졌고 어떤 믿음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믿음의 결과가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때때로 믿음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야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섬에서 "오클랜드에 가면~"이라고 믿었던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믿음 덕분에 우리는 피곤해도 힘들지 않게, 불편해도 짜증 나지 않게 남섬에서의 일주일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믿는다는 것은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
2023년 10월 9일,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AR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85] 나는 ORIGINA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