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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21. 2023

[D-72] 선택 스펙트럼

294번째 글

날이 제법 추워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만 쌀쌀했는데 이젠 낮에도 공기 자체가 서늘해진 느낌이다. 낙엽도 지기 시작했고 길가의 은행나무들도 조금씩 노랗게 물들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단풍 구경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화담숲이나 청평사처럼 단풍으로 유명한 곳에 가서 절경을 즐기고 싶어 진다.


하지만 그렇게 단풍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과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고 있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풍을 보러 몰려올 텐데, 그 인파에 나도 끼여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득해진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나무들을 보며 감탄하고 눈에 경관을 한가득 새기고 오고 싶은 마음이 반, 또 어차피 가봤자 너무 붐벼서 사람 뒤통수만 보고 오는 게 아닌가 싶어 가기 싫은 마음이 반이다.


선택하기 전의 마음은 늘 이런 식이다. 늘 '한편으로는……'의 상태에 놓인다.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기 싫은 마음도 있고, 가기 싫은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래서 언제나 선택의 상황은 스펙트럼처럼 내 주변에 펼쳐진다. '하고 싶다'와 '하기 싫다'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다.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고, 0% 아니면 100%인 것이 아니고, 두 개의 버튼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그 사이의 긴 스펙트럼에서 다양하게 갈팡질팡하다가, 약간 더 이끌리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나 후회를 많이 하는 것도 선택이 이런 스펙트럼 형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거나 안 하거나, 그런 딱 잘라 떨어지는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고 스펙트럼 사이를 헤매며 49%와 51%가 각각 어느 방향 쪽인지를 저울질하다가 겨우 한 걸음을 옮기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늘 가지 않은 바로 옆 방향, 1도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는 그 방향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고, 그래서 의심하고, 그래서 미련을 갖고, 그래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후회하는 것이 당연하고 미련이 남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늘 나의 선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선택이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 생각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원래 그런 거니까 선택 앞에서 너무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점은 내게 용기를 준다. 후회가 남는 것은 당연하니까 너무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나를 너무 많이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게 해 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선택의 스펙트럼 속에서 갈등하며 스스로 선택한 방향이 옳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은 내게 위안을 준다.


오늘 내가 선택한 방향은 과연 옳았을까? 어제의 선택은 괜찮았던 걸까? 내일은 더 나은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답을 모르고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나는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라고.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스펙트럼 속에서 적당한 위치와 적당한 방향을 찾아낸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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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1일,
식탁에 앉아 TV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Katie Moum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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