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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29. 2023

[D-64]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었거든요

302번째 글

오늘 새벽에 끔찍한 꿈을 꿨다.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서 아주 큰 안도감이 들었다. 현실은 꿈보다 덜 끔찍했기 때문이다. 꿈속의 디스토피아 같은 세계와 비교하면 현실 세계는 훨씬 나은 곳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잠을 청하려 누우면서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끔찍한 꿈을 꿨는데, 꿈에서 깨 보니 현실이 더욱 끔찍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최악의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깨어난 이후의 현실이 더 끔찍한 세상에서 살게 된다면, 그래서 안도의 한숨이 아닌 무겁고 비참한 한숨을 내쉬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었거든요.


얕은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이 문장을 떠올렸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 나오는 짧은 대사이다. 이 대사는 이 소설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문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문장을 꼽자면 대부분 내내 반복되어 나오는 '뭐, 그런 거지.'라던지,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지지배배뱃?' 같은 부분을 고를 테지만, 내게는 이 문장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중요한 인물의 결정적인 대사도 아니고 조연 캐릭터의 입을 빌려서 지나가듯 나오는 이 대사가.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었거든요."


소설 속에서 빌리 필그림은 드레스덴 폭격을 포함해서 2차 대전의 참상을 겪고,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함을 목격하면서, 그 끔찍한 현실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이라는 가상 공간으로의 도피를 선택한다. 그 도피를 통해서 빌리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죽어도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살아 있었으므로 결국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작중에서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긴 하지만, 그런 인식을 갖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고자 했던 빌리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끔찍하고 참혹한 기억은 잊히지 않지만,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었기 때문에 빌리는 그런 가상의 도피처를, 또 새로운 인식을 개발해 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끔찍한 꿈에서 깨어나서 더욱 끔찍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빌리 필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었거든요."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아무리 부조리하고 아무리 모순적이어도, 나는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잠에서 깨서 어떤 참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아마 그저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저 적당히. 지금껏 내게 주어진 작고 보잘것없는 불행들을 내가 받아들였듯이 그 거대한 불행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
2023년 10월 29일,
소파에 앉아 창 밖 잡음들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Oliver Guhr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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