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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22. 2023

[D-344] 사람보다는 동물에게 더 이입하는 경향

22번째 글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자주 운다. 아무도 안 우는 포인트에서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고, 혼자 오열하기도 하고, 때로는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울곤 한다. 나는 정말로 울리기 쉬운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아주 확실하게 울리는 방법은 동물 친구를 영화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특히 아프거나 죽는 동물이 나오면 100%다.


우스운 지점은 내가 사람이 죽는 영화는 나름 잘 본다는 것이다. 숨 쉬듯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액션 영화도 잘 보고,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도 가끔 본다. 사람이 몇천, 몇만 명 단위로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고전들도 굉장히 좋아한다. 휴먼 드라마 장르에서 누가 죽을 때도 슬퍼서 울긴 하지만 그럭저럭 견디는 편이다. 하지만 동물이 다치거나 아프거나 죽는 장면이 나오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런 안 좋은 일 없이 행복한 동물이 나와도 눈물이 난다. 더 행복하고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현실적이신 분이라, 영화를 볼 때도 몰입하면서 보기보다는 그냥 내용을 '감상'하시는 타입이다. 그리고 눈이 시원시원한 액션 영화도 좋아하셔서 <존 윅> 같은 영화를 재밌게 잘 보신다. 이 영화 시리즈에서는 존 윅이 3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죽여버리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엄마가 TV를 보면서 우시는 경우가 딱 하나 있다. 바로 <TV동물농장>을 보실 때다. 유기견이나 학대당하는 고양이 등 안타까운 사연이 나오면 나도 엄마도 바로 훌쩍거리면서 휴지를 찾기 시작한다.


왜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장면은 그냥 보면서, 동물이 학대받는 것은 보기 어려울까? 이 점을 한번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방위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서 싸움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때로 폭력을 통해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람이 동물을 때리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거나 동등하다고 느껴질 수가 없다. 여기서 쾌감은 절대 찾아볼 수 없다. 강자에 의해 약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이자 학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종의 '폭력의 방향성 논리'는 꼭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강자에게서 약자 방향으로 폭력이 가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보기 힘들다. 예를 들면 어른이 아이를 학대할 때나 남성이 여성을 학대할 때처럼 말이다. 이 방향으로의 폭력은 아주 비겁하다. 강자에게 맞서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강자의 앞에 나서서 싸우는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약자를 상대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싸움을 하는 사람은 그저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비겁한 겁쟁이일 뿐이다.


이런 비겁한 폭력은 결국 공감 능력의 결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느낄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공감하는 동물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지점은 우리의 공감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고통이더라도, 누군가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능력, 그리고 기꺼이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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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2일,

소파에 기대앉아서 스포츠 경기 중계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Rebecca Scholz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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