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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09. 2023

[D-53] 당연하지 않았다

313번째 글

핸드폰을 세면대에 빠트렸다. 급하게 건지고 흐르는 물에 씻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검색해 보았는데, 내가 사용하는 기종은 방수 기능이 있어서 그냥 마른 천으로 닦아서 말리고 바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핸드폰을 꺼 두거나 SD카드, 유심카드를 분리할 필요도 없고 그냥 쓰면 된다고. 안심하고 핸드폰을 켜 이리저리 살펴보니 정말로 아무 문제 없이 잘 작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삼 기술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씻어서 사용할 수 있는 전자기기라니, 이 정도로 방수가 된다니.


그러다 문득 핸드폰이라는 기계 자체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이 작은 기계 안에 얼마나 많은 기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을까? 나는 이 작은 기계로 전 세계의 사람들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음식을 주문할 수도 있고,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간식거리를 현관 앞까지 배송시킬 수도 있다. 그동안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해 왔지만 사실 이 기계의 존재는 당연하지 않았다. 이걸 당연하게 만들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다 그렇다. 세탁기는 당연하지 않았다. 손난로는 당연하지 않았다. 평면 TV는 당연하지 않았다. 수세식 변기는 당연하지 않았다. 유리로 만든 창문은 당연하지 않았다. 내가 먹는 마그네슘 영양제는 당연하지 않았다. 극세사 이불은 당연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도 얼어 죽지 않을 수 있는 주거와 난방 기술은 당연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다. 21세기에는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지만, 과거에는 그저 마법처럼 여겨지거나 허무맹랑한 꿈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또 나의 신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감탄하고 있는 이 기술들로도, 인류가 지금까지 열과 성을 다해 발전시켜 온 이 기술들로도, 아직 나 같은 존재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 갑자기 너무나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 눈만 해도 그렇다. 어제 나는 예전에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다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그 풍경이 사진에 잘 담기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카메라라도 내 눈으로 보고 내 머릿속에 저장해 둔 기억만큼 그 풍경을 재생해 내지 못한다. 사람의 눈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카메라보다도 정교하고, 사람의 뇌는 그 어떤 저장장치보다도 더 고도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눈을 뜨고 살아왔지만 나의 눈은 당연하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당연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우연의 연속으로 탄생해 우연한 사건들을 반복하며 변화해 왔고, 그 결과 우연히 인류가 생겨났고, 우연히 나라는 사람이 태어나 우연히 지금까지 살아있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디작은 확률을 뚫고 지금 이 세상에 지금 이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지. 



/
2023년 11월 9일,
침대에 엎드려 유튜브로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Damian Patkowski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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