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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15. 2023

[D-47]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인가 보다

319번째 글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해낸 것들도 전부 운이 좋아서라거나 다른 사람들이 호의를 베푼 덕분이라고 느껴진다.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잘못 본 덕분이거나.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우연히 몇몇 사람들이 내게 그런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고는 애정과 기회를 줘버린 건 아닌지, 내가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나의 실체에 비해 과분한 사랑과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고 과분한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곁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 가족들은 나를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응원해 준다. 나를 받아들여주고 나와 친구가 되어주고 기꺼이 사랑해 준 오랜 친구들도 있다. 내게 돈을 주면서까지 일을 시켜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내 능력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을 내린 회사도 있다. 나와 함께 믿고 일해주는 동료들도 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몇몇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내가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면 이 사람들을 믿어보면 어떨까. 어차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극도로 신경 쓰며 눈치를 보는 성격이니까. 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한번 믿어보면 어떨까. 내 곁을 지켜 준 이 소중한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을 보면 나는 아마 사랑받을 만한 자질이 있나 보다. 이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 주고 함께해 주는 것을 보면 내게 그런 자질이 있나 보다.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인가 보다. 그런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멍청하지도 않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지도 않고 심성이 나쁜 것도 아니다.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 전부의 판단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짓이다. 이 사람들 모두가 나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은 현실성이 없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들 모두를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는 생각, 그러고도 잘 빠져나왔다는 생각은 오만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 정도로 나를 사랑해 주고, 이 정도로 나를 신뢰해 준다면, 나는 나 자신을 믿어도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식견을 한번 믿어보는 거다.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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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5일,
버스에 앉아 버스가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Zdeněk Macháček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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