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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24. 2023

[D-342] 우울한 노래가 듣고 싶은 날

24번째 글

왠지 모르게 울적한 기분으로 깨어나는 날이 있다. 잠에서 깼는데 찌뿌둥한 몸이나 무거운 눈꺼풀이나 짙은 피로감보다도 가만히 내려앉은 감정이 먼저 느껴지는 날. 그래서 어쩐지 침실이 잿빛이나 청회색으로 느껴지는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딱히 울적할 이유는 없었는데 울적하게 깨어났다. 어제 해야 할 일도 다 끝냈고 맛있는 것도 먹었고 재밌는 영화도 봤고 가족들이랑도 즐겁게 얘기했고 잠도 잘 잤는데 왜 그런 울적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이 연휴 마지막 날이라 우울한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날씨가 유난히도 추워서 기분이 가라앉은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이런 기분이 든 이상, 우울한 이유를 고민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이 울적함에 한동안 잠겨 있거나 울적함을 풀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이런 울적한 기분으로 깨는 날이면 아침부터 우울한 노래가 듣고 싶어 진다. 그러면 더 우울해지는 게 아닌가 싶지만 오히려 우울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쓸데없이 울적해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밝고 경쾌한 노래를 틀거나 텐션을 올리려고 하거나 억지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몸에서 한숨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억지로 우울을 벗어 버리려다 보니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해서 더 빨리, 더 많이 지치는 거다. 그런데 이 울적함을 받아들이고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그대로 우울에 잠겨 있노라면 이유 없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함을 잔뜩 느끼는 동안 나는 우울에서 벗어날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리고 우울한 노래를 듣다 보면 위로가 된다. 분명 느린 템포에 무거운 단조, 서글픈 멜로디와 더 슬픈 가사를 갖춘 축축 처지기에 안성맞춤인 노래인데도 듣다 보면 더 우울해지는 느낌이 든다기보다는 반대로 희망이 느껴진다. 한없이 땅 속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 물 속으로 끝도 없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의지나 결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나 위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차분한 곡조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충분히 우울감에 잠길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그럴 수도 있다.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깊은 물 속에서 가라앉고 있을 때,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위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가라앉는 동안에는 그저 가만히 무력하게 빠져들 수밖에 없을 때, 바닥에 닿는 것은 전환점이 된다. 바닥까지 닿으면 그 바닥을 힘차게 차고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데에서 오는 안심이 다시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한다. 또 이 깊은 물 속 모래바닥에도 약간의 빛은 들어오고, 이 모래 속에 불가사리며 바다게며 소라 등이 살고 있다는 데에서 위안과 깨달음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울적한 기분이 드는 날, 우울한 노래가 듣고 싶은 날에는 그냥 그렇게 한다. 오늘은 데미안 라이스의 '9 Crimes'를 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노래를 더. 오늘은 울지 않았지만 가끔은 울기도 한다. 그렇게 충분히 내 감정을 소모하고 나면 그동안 모은 에너지로 일상을 시작할 수 있다.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집 밖으로 나설 수 있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다. 의학과 관련된 지식이라곤 고작 학생 시절 생물학 과목을 공부할 때 배운 기본적인 것들과 책에서 읽은 것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의사의 전문적인 소견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할 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글쓰기를 통해 내 마음을 정리하고 나를 조금 더 잘 받아들이려는 목적으로.



/

2023년 1월 24일,

책상 앞에 앉아서 스트리밍 앱으로 노래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israelbest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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