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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30. 2023

[D-32] 휴식을 취할 때를 아는 사람

334번째 글

내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그 사실은 알고 있다. 적절한 휴식이 없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적절한 휴식이 없으면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쉬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언제 쉬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지금이 쉬어도 되는 타이밍인지 확신이 없다. 정말 쉬어도 되는지, 지금은 휴식보다는 열심히 달려야 하는 시기가 아닌지, 지금 취한 휴식이 내 인생을 안 좋은 쪽으로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지, 그런 고민들을 하느라 언제 어떻게 쉬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마치 커다란 파이를 앞에 놓고 먹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언젠가 이 파이를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배가 고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 파이를 언제 먹어야 할지, 얼마나 먹어야 할지, 어떻게 먹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이가 지금 따끈따끈할 때 한 조각을 빨리 베어무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식어서 바삭해지고 난 뒤에 먹어야 더 맛있을까? 1/8쪽으로 잘라서 한 조각만 먹고 나머지는 다음을 위해 아껴 두어야 좋을까? 아니면 아껴 뒀다가는 파이가 금세 상해 버리고 말 테니 며칠 내에 다 먹어 버리는 게 좋을까? 다음 파이를 언제 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지금 이 파이를 다 먹어도 괜찮은 걸까? 아껴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아껴 뒀다가 아깝게도 다 버리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과연 지금 파이 한 조각을 먹어도 괜찮을 만큼 배가 고픈 걸까? 가짜 배고픔은 아닐까? 먹고 나서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만약 먹는다면 얼마나 먹어야 할까? 이 파이를 먹고 배가 아프지는 않을까? 과연 맛있기는 할까? 이걸 안 먹고 참으면 더 맛있는 파이를 얻게 되는 건 아닐까? 나중에 누가 와서 내게 왜 파이를 먹었냐고 혼을 내지는 않을까? 이 파이를 먹었기 때문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나를 괴롭게 한다. 그냥 파이 한 조각을 먹는 일인데도.


휴식을 취하는 일은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한다. 내가 지금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경쟁에서 뒤처지고 내 생활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든다. 입버릇처럼 쉬고 싶고 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제대로 잘 쉬지는 못하게 되는 거다. 이건 내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잡고 설 수 있는 기둥이 없기 때문이다. 겁먹지 않고 나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휴식을 취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 그리고 휴식을 취하면서 후회하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사람. 휴식이 끝난 뒤에 무엇이 기다리더라도 나의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 자신을 믿고 싶다.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선택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에 놓인 한 조각의 파이를 언제 먹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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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30일,
침대에 엎드려 유튜브로 겨울 재즈 음악을 들.



*커버: Image by Diliara Garifullin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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