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번째 글
이 생에서 내가 갖고 태어난 사명은 무엇일까? 어떤 사명이 내게 부여된 것일까? 그것을 알고 싶다.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태어날 때 그 사명이 적힌 쪽지를 손에 쥐고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날 때부터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내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아마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이 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무대에 서는 배우는 자신이 등장해야 할 장면과 무대에서 해야 할 대사와 행동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가면 대기실에 앉아 쉬었다가 다음 장면의 등장을 준비할 수가 있다. 사명을 명확히 알고 있다면 아마 이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내 존재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이 언제인지를 미리 알고, 내 역할이 세상에 등장해야 할 때만 잠깐 무대에 올랐다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말이다.
가끔은 이 세상은 영화나 게임 속이고 나는 그 세상에 등장하는 엑스트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 역할은 적절한 시점에 특정 장소에 나타나 주인공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는 역할뿐이다. 그 단역을 맡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평소에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별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살다가, 바로 그 순간 바로 그곳에 나타나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말 몇 마디를 해 주고 무언가 도움이 되어 주고 바로 또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내가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어떤 역할을 맡은 건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내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만 가득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 사명은 완수하는 것보다 찾아 헤매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내 사명은 무엇일까?' 나는 그 질문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해 왔다. 그리고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질문은 내게 해보지 않았다. 바로 '왜 나에게 사명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말이다. 나는 그 질문은 던지지 않은 채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만을 자문해 왔다. 왜 나에게 역할이 필요한지, 왜 내 인생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고서. 그래서 이젠 그 부분이 궁금하다. 내게 과연 역할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내 인생에 과연 중요한 의미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가.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 나는 내 선택과는 무관하게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삶을 이어간다. 여기에 어떤 거창한 의미는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내게 무언가 맡겨진 임무가 있는데 내가 그걸 잊어버려서 다시 기억해 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이, 단지 이 인생이 내게 선물처럼 주어졌기 때문에 살아가면 왜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다. 잘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디 한번 살아보려고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내 삶에도 중요한 의미와 사명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고, 더 열심히 찾아봐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싶다. 살아 있는 감각을 가득 느끼고 싶고 순간에 충실하게 살고 싶다. 무엇인지 모를 사명을 찾아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며 방랑하기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