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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Dec 02. 2023

[D-30] 액자에서 벽지로

336번째 글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있다. 잊고 싶은 기억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예전 일들이,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일들이. 누구나 밤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 이불을 찬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마치 영사기를 돌리듯 부끄러운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후회하고 창피해하고 이불을 차느라 잠을 못 자기도 한다.


이런 흑역사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이런 기억들은 가장 오랫동안 남고 가장 생생하게 남는다.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마치 장식장에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박물관의 유리 보관함 안에 놓여 있는 것처럼, 흑역사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래서 가끔은 컴퓨터에서 파일을 휴지통에 버리듯이 기억을 쉽게 지워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스위치를 내리는 것처럼 기억을 잠깐 꺼 두거나. 뮤지컬 <북 오브 몰몬>에 나오는 'Turn It Off'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When you're feeling certain feelings
That just don't seem right
Treat those pesky feelings like a reading light

And turn 'em off
Like a light switch, just go bap!
Really, what's so hard about that?
Turn it off, turn it off!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느껴진다면
그 성가신 기분을 독서용 램프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불을 꺼버려요
전기 스위치를 내리듯이 그냥 탁!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꺼버려요, 꺼버리세요!

- Turn It Off 중에서.


하지만 이렇게 스위치를 내려 버리는 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악화시킨다. 없던 일처럼 부정하고 부끄러워하며 감추려고 하고 잊어버리려고만 하면 그 기억은 더더욱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내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 머릿속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해 가면서, 점점 더 나를 좀먹으면서.


그래서 정말로 흑역사로 고통받지 않고 싶다면, 그걸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 일이 정말 일어났었던 일이고, 내가 그 일을 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흑역사로 인해 잠 못 드는 날들을 줄일 수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창피하고 부끄러운 기억일수록, 액자가 아닌 벽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흑역사가 오래 기억되고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액자에 끼워 보관해 놓고는 매일 밤 곱씹기 때문이다. 아무리 액자 위를 비추는 조명을 꺼 버린다 해도, 액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오히려 액자의 존재를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액자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벽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벽지는 특별한 게 아니니까. 그저 내 방에 발린 채 나와 함께하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무언가니까. 내가 그 흑역사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 그 흑역사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액자에서 기억을 빼내 벽지로 바르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면 말이다. 마치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처럼.



/
2023년 12월 2일,
소파에 앉아 쏟아지는 햇빛을 즐기.



*커버: Image by Mick Haupt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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