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독서 챌린지, 아홉 번째 책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누구나 청소년기에 한 번쯤은 추리소설에 푹 빠지는 시기를 지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 이 일반화에 잘 들어맞는 사례 중 하나이다. 나는 지금은 추리소설을 거의 읽지 않지만 십대 초중반 시절에는 한동안 추리소설에 열광했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작가는 엘러리 퀸이었다. 엘러리 퀸 시리즈는 특유의 연역 추리 방법 때문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미스터리와 의문점을 쌓아가다가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에 아주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데, 이 엔딩의 짜릿함이 나를 엘러리 퀸에 유독 열광하도록 만들었었다.
그래서 아직도 내 책장에는 엘러리 퀸 시리즈가 거의 한 칸을 다 채우고 있다. 국가명 시리즈도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읽지 않고 있던 책이 바로 이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원래는 1권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부터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었고 자연스레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도 펼쳐 들었었는데, 이 책 속의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고 끔찍해서인지 도중에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다. 국가명 시리즈가 딱히 순서가 중요한 건 아니라서 나는 우선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의 '추리소설 시기'가 끝나버렸다. 그래서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는 읽힐 기회를 놓친 채 꽤 오랫동안 내 책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최근에 생긴 집중력 문제 때문이었다. 업무량도 너무 많고 업무 스트레스도 너무 심해서인지 책을 읽을 때 제대로 집중이 잘 안 되었다. 그래서 한 페이지를 계속 반복해서 읽는다거나, 읽다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자꾸 같은 문장으로 돌아온다거나, 분명 읽었는데 전 페이지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도통 진도가 안 나간다거나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 집중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를 푹 빠져들게 해 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량이나 스트레스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읽는 책이라도 조금 더 가볍고 매력적인 책으로 바꿔보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책장에서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을 챌린지의 아홉 번째 책으로 고르는 데에는 몇 초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엘러리 퀸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떤 팬들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를 엘러리 퀸 최고의 걸작으로 꼽기도 한다던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재밌다! 독자의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 한 순간도 지루하게 만들거나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너무 재미있고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하루에 200페이지 넘게 읽은 날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다시 읽은 이 책은 예전에 내가 느꼈던 것만큼 으스스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스릴러·미스터리 장르들을 더 다양하게 접하고 또 영상물로 많이 접하게 된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어나 호러를 포함해서 워낙 충격적이고 무서운 작품들을 이것저것 보다 보니 청소년기에 느꼈던 충격적인 공포가 지금은 조금 무디게 느껴진 게 아닐지. 아무튼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는 전과는 달리 무섭기보다는 흥미진진하다고 느껴졌다.
특히 대단하다고 느꼈던 건 단서를 배치하는 능력과 소재들을 사용하는 우아한 방식이다. 이 작품에는 아주 자극적인 소재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이비 종교와 나체촌, 기괴한 방법의 살인 등등. 자칫 잘못하면 작품을 저급하게 만들거나 사건에 대한 흥미 자체를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는 자극적인 소재들이다. 그러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는 이런 소재들을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선을 잘 지킨다고 해야 할까. 그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또 한 가지 좋았던 점은 단서들을 흘리며 독자의 추리와 경쟁하는 엘러리 퀸 특유의 스타일이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점이었다. 엘러리는 혼자서 사건을 풀어 가지 않는다. 엘러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독자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엘러리 퀸 시리즈를 읽을 때면 누가 범인일지, 동기는 무엇일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추리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집중력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워낙 몰입해서 읽어서인지 단서 하나가 밝혀질 때마다 흥분해서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한 적도 있다. 지금 여기에 그 단서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또 나는 어떻게 추리했고 엘러리의 추리와는 무엇이 달랐는지를 구구절절 적지 못하는 점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 책을 아주 시기적절하게 고른 덕분에 다시 예전처럼 '추리소설 시기'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엘러리 퀸 국가명 시리즈는 언제가 됐든 전부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이런 고전 추리소설이 주는 재미를 내가 느낄 수 있는 한, 엘러리 퀸은 언제나 내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캐릭터로 남을 것이다.
*커버: Unsplash의 Harry Gill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