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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23. 2023

[D-284] 내가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82번째 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운명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럴 운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내용의 신탁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벗어나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운명이 이끄는 비극적인 파멸의 길로 더 깊이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또 삼국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좋지 못한 결말로 인생을 마감하곤 한다. 스스로의 오만함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몰락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 몰락하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다가 몰락하기도 하고, 의심과 불신 때문에 몰락하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줄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몰락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비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성격적인 결함 때문에 파멸한다. 햄릿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서, 맥베스는 욕망 때문에, 오셀로는 질투에 눈이 멀어서, 리어 왕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서. 이들의 성격적 결함은 어떠한 계기로 인해 증폭되고, 그 결과 이들은 스스로 그 자신을 파멸시킬 비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다양한 비극과 비극 속의 캐릭터들을 떠올리며 나를 생각하고 있다. 만약 내가 비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라면 과연 어떤 이유 때문에 파멸하고,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싶어서. 내가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과연 나의 비극적 결함은 무엇일까?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결함은 '의심'이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나를 파멸시킬지 모른다. 내가 나를 의심해서,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비극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다. 예를 들면 누군가 나를 보고 순수한 의도로 칭찬을 하고 감탄을 했는데도 그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은 의도 따위를 고민하다가 잔뜩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져서 끝내 무너져 버리는 결말을 맞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집착' 때문에 파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내가 설정해 놓은 나 자신에 대한 엄격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또는 완벽하지 못한 내 모습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끝내 나 자신을 파멸로 끌고 가게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전전긍긍하고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다가 그런 내 자신에게 질려버린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이다. 이런 결말이라면 아마 죽어가는 내 캐릭터의 마지막 대사는 "왜 나를 미워하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했느냐? 그렇다면 말하라. 내가 더 주겠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느냐? 그렇다면 내가 밤낮으로 더욱 노력하겠다. 왜 그대들은 독배와 칼과 화살을 내밀며 나를 미움으로 대하는가? 나는 그대들을 기쁘게 하고자 모든 것을 했다!" 같은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살해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폐하." 그러면서 마지막 일격을 날려서 내 숨통을 끊어 놓는 장면이 이어진다. 내 캐릭터는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셰익스피어적인 죽음을 맞기는 싫다. 다행히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고, 내 비극적 결함을 통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알고는 있다. 그래서 내게는 희망이 있다. 파멸로, 몰락으로, 비참으로 이끌려 가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노력하고 있다. 내 결함을 조금 덜 커다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2023년 3월 23일,

버스에 앉아서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Joni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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