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선생 Dec 05. 2023

연결감의 회복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인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의 본성이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니다. 그리고 이 연결감의 진실 속에 머무를 때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예전 글 <우연히 행복을 만난 날>의 그 날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물을 마신 후 컵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싱크대 상판에서 개미 한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개미를 고요한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까맣고 작은 생명이 가느다랗고 뾰죡한 다리를 하나 둘 하나 둘 부지런히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처럼 더듬더듬 거리며 이리저리 헤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는데 순간 개미가 활짝 열린 제 마음으로 걸어들어왔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연대감이 느껴졌습니다. 활짝 열린 마음에서 나타난 그것은 광대하고 고요한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작은 개미와 나 사이와 그 너머에 거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개미가 나이고 내가 개미였습니다. 구분없는 사랑 속에서 하나로 존재하는 속에 한없는 사랑과 안온함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벌레를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길가의 꽃을 함부로 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연결감을 느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안도감을 느낍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서 안심하는 것처럼 안심하고 걱정을 내려놓게 됩니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꼈을 때, 키우는 애완동물이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꼈을 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연에의 연결감을 느꼈을 때 우리가 잠시나마 갖게 되는 깊은 안도감은 우리가 본연의 자리에서 느끼는 연결감을 잠깐이나마, 비슷하게나마 경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한다는 요구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 희생했으니 너도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해야한다는 통제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댓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고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구분이 지어지지 않는 하나됩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편할 때 근저에는 그 불편함을 일으키는 하나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근원을 따라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홀로 떨어져 있는 나"라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나는 세상의 것들과 떨어져있는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때로는 자책의 느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때로는 자만의 느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집착일수도 때로는 회피일 수도, 이유를 알기 어려운 막연한 불안감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나"라는 독립된 개체는 "이러이러하다" 또는 "이러이러 해야한다"는 믿음이 불편함을 자아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너"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남에 대해 세상에 대해 시비분별하는 마음이 불편함을 자아냅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우리가 진실에서 멀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생각이 진실에서 멀어졌을 때 불편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본성의 자리에서 모두 연결된 하나이며 나는 결코 홀로 떨어져 있는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때 그 불편함이 사그라듭니다. 삶에서 그 어떤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애쓰지 않아도 안심이 됩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마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그 불편함마저 조건없이 수용하게 될 때 본연의 자리의 평화로움이 드러납니다. 삶이 무엇을 주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때 내 본연의 모습이, 그 자연스러운 평화로움이 드러납니다. 내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나라는 통로를 통해 살아지고 있음을 목도할 때 힘이 빠지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됩니다.



홀로 떨어져 있는 "나"를 내려놓는다는게 처음에는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의 분리된 의식은 항상 나를 주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작디 작은 나에게 이롭다고 믿는 쪽으로 세상을 운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어지는 상태를 받아들이기가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보면 삶이 내 마음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 자체가 괴로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여행을 가는 날 비가 온다고 하늘을 탓하는 작은 마음으로만 삶을 살아간다면 삶이 무겁고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입니다. 


그러니 시작은 연결된 나의 마음, 전체로써의 나의 마음을 상상으로라도 느껴보는 것으로도 좋단 생각입니다.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작은 나의 시선을 넘어서 전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느껴봅니다. 이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어 그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그 연결된 자리에서 지금 이순간을 느껴본다면 어떨까. 만약 신을 믿으신다면 내가 믿는 신의 자리에서 신은 어떤 마음일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작은 나의 시선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마다 내려놓고 더 크게 바라보고 느껴봅니다. 작은 나의 시선을 넘어선다는 것이 남에게 휘둘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에게 휘둘리는 것 또한 나와 남을 구분짓는 행동입니다. 남에게 사랑받고 싶고 좋은 소리 듣고 싶어 하는 것 역시 나를 고집하는 일입니다.  


자연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자연은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돌고 돌며 순환하는 속에서 그 어느 것에도 걸림없이 순응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의 의지를 드러내며 개성을 뽑내는 자연은 그 자체로 삶의 교과서이자 말없는 스승입니다. 자연 속에서 산책을 하며 현존할 때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걱정 역시 때가 되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며 완벽하게 조화로운 자연의 모습에 동화됩니다. 


조금씩 연결감을 회복하고 구분이 사라지고 나의 시선이 진실의 자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순간 순간 가장 지혜로운 방식으로 흐르게 됩니다. 


내 영혼이 원하는 삶이 나를 통해 살아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와 명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