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제주는 늦은 오후 시간대가 가장 아름답다. 제주의 저녁 풍경은 평화롭고 사랑스럽고 신성하기까지 하다. 동쪽 해안에서 제주시를 향해 서쪽으로 달리는 도로에서 보는 풍경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나즈막한 오름의 등선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끝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다정하다. 등선 너머 저 멀리 펼쳐진 바다가 평화롭다. 매일 변하는 모양의 하늘은 언제 봐도 새롭고 경이롭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아이들과 거의 매주 주말에 교외로 나들이를 다녔다. 산으로 바다로 테마파크로 공원으로 하루 종일 싸돌아다니느라 지칠 법도 한데 아이들은 돌아오는 길에서마저 에너지가 넘쳤다. 아이들이 뒷자석에서 웃고 떠들고 하는 중에도 달리는 내 마음은 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에 풍덩 빠져버리곤 했는데 그럴 땐 아이들 떠드는 소리조차 아름다운 배경 음악처럼 들리곤 했다. 뭔가 벅찬 감동이 올라와서 울기도 여러번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울면 "엄마 행복해?" 라고 물어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너무 행복하거나 감동적일 때면 눈물이 난다. 한번 슬퍼서 운다면 아홉 번은 행복해서 운다.
이럴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이셨는데 성인이 되시면서 직장을 찾아 "육지"로 떠나셨다. 낯선 부산에서 동향 친구분들과 주로 어울리시던 두 분은 서로가 같은 고향 출신인 점에 이끌려서 만났고 결혼까지 하게 되셨다고 했다.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혼이 종종 그리운 고향을 방문하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마 지금 나처럼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바라보고 행복해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한번 더 마음으로 깊이 느껴보게 된다.
오늘날 제주에 우리 가족이 살게 되기까지 그 배경에 나의 부모님과 수많은 인연의 은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이 종종 있다. 뭔가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이 땅에 사신 선조와 무수한 생명과 신의 가피가 나와 함께 있다 느껴진 적도 있었는데 그 느낌은 마치 내 등 뒤를 따듯하게 감싸 안고 무한한 사랑을 보내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들과 교외에 주말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시는 듯 했고. 코로나로 모두가 흔들릴 때는 "걱정마라 걱정마라" 하셨고 남편이 암진단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는 "괜찮다 괜찮다" 하시는 듯 했다.
이런 느낌이 들때면 저절로 만물에 대한 감사함이 가슴 속에 벅차오른다. 오늘의 우리가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무수한 분들의 가피를 입고 이 세상에 나왔고 지금껏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겸손해진다. 길가의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게도 감사함이 넘친다. 덕분에 우리가 좋은 공기를 마시고 비옥한 땅에서 나온 곡식을 먹고 산다. 꼭 살아 있는 생명뿐이 아니라 돌맹이 하나에게도 사랑이 느껴진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이 이렇게 넓어질 때면 온 세상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건 그냥 무심코 한 말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 모두는 정말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