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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Oct 23. 2019

#30. 당연도 당연히 노력을 요하는 법

2019.10.22.

잠을 잘 자는 편이다. 다만 카페인에는 취약하다. 기자를 만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엉겁결에 커피를 마시게 된 날은 날이 밝을 때까지 뒤척여야만 했다. 아무튼, 이런 특수한 조건이 없다면 딱히 불면에 시달리지 않고 쉬이 수면에 빠져든다. 소위 말하는 ‘머리만 대면’ 자는 부류의 일원이랄까.


하지만 지난 모든 세월이 내게 숙면의 나날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스물넷의 여름부터 대략 삼 년 정도는 잠자리가 참 불편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언가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의욕은 있는데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답답함,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정체 모를 패배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자꾸만 눈꺼풀을 까뒤집는 듯한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잠에 들 때까지 노트북에 반복 재생해두고 꾸역꾸역 감상하던 것이 딱 두 개 있다. 미드 <오피스>와 <무한도전>이다. 마치 가족과도 같이 가깝게 느껴지는, 어쩌면 피붙이보다 더 친근하고 편하게 다가오는 두 프로그램 속 인물들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포근한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지난주엔 <나혼자산다>에 허지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러 찾아보았다. 그가 방송인으로 활약하기 전부터 그의 글을 즐겨 읽던 독자였고, <썰전>을 비롯 <마녀사냥> 등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할 때도 출연작들을 꼬박꼬박 챙겨 보았었다. 글에서도 말에서도 표정에서도 그가 내뿜는 특유의 시니컬함, 쿨함이 근사해 보였다.


오랜만에 접한 그는 이전과 꽤나 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본인부터가 결혼과 자녀 계획을 언급하며 자신이 180도 변했노라 털어놓을 정도니, 그간 정말로 힘들었나 보구나 짐작이 된다. 괜히 반가웠던 건 그가 암 투병 중에 그리고 완치가 된 지금도 <무한도전>을 매일 시청한다는 것. 나도 그 기분 안다, 고 감히 한마디 보태고 싶은 대목이었다.


그의 마지막 인터뷰 내용도 가슴에 와닿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너무 대단한 것이었고, 그런 일상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하루하루를 별일 없어도 별일 있는 것처럼 기쁘게 잘 살고 있다." 흔한 말이겠지만 그 울림은 흔치 않았다.


일본어로 당연하다는 ‘当然(토-젠)’ 또는 ‘当たり前(아타리마에)’라고 쓴다. 전자는 한자어 ‘당연’을 그대로 읽은 것이고 후자는 어원에 대한 몇몇 설을 가진 일본어만의 표현이다. 그중 나는 ‘사냥이나 농사 등 공동의 일에 참여한 뒤에 한 사람이 받아 가는 할당량(一人当たりの分け前: 히토리아타리노와케마에)’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결국 내 노력의 결과라는 것, 당연함을 누리려면 응당 그에 준하는 몫을 해야 한다는 것, 만약 내가 애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사실 내가 감당해야 할 바를 다른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상기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니 필시 내가 요즘 잠을 잘 자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퍼뜩 떠올려 봐도 늘 깨끗하고 따뜻한 이부자리를 위해 내가 한 거라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키는 것 이외엔 없다. 잠을 설치게 만들 정도의 큰 병이나 걱정이 없는 것도, 생계를 위해 잠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가계 상황도, 매일 밤 이렇게 마음 편히 일기를 쓸 수 있는 것도 다 혼자 한 일이 아닐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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