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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Jan 17. 2021

#97. 아내가 시무룩해 보이는 날은

2021.01.17.

펩시맨을 기억하시는지. 근육질 몸매가 두드러지는 은빛 쫄쫄이, 가슴팍에는 펩시 로고를 새기고’ ‘딴~ 딴~ 따단 딴~ 딴~ 따단 딴~ 딴~ 따단’ 멜로디와 함께 등장해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콜라 한 캔을 건네던. 1997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한국에 CF가 방영되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캐릭터다.

당시 나와 친구들도 적잖이 그 이상한 아저씨 흉내를 내고 다녔더랬다. 그를 향한 팬심을 증폭시킨 건 바로 그를 소재로 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다. 펩시맨이 앞으로 달려가며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하는 단순한 아케이드 게임이다. 그게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방과 후엔 항상 붙어다니던 셋이 모여 해가 지도록 몰두했던 기억이 난다.

신년을 맞아 관석네에 초대받은 날, 아주 오랜만에 추억의 게임을 했다. 스치듯 흘린 “오랜만에 펩시맨 게임을 하고 싶다”라는 내 말을 놓치지 않고 인터넷을 뒤져 설치한 관석의 세심한 배려 덕이다. 불과 십 분 만에 피로를 호소하며 PSP를 내려놓기는 했지만. 에휴, 나도 늙었다.

오렌지색 아디다스 저지와 추리닝 반바지 차림으로 부엌에서 분주한 관석을 보며 참 펩시맨 같다는 생각을 했다. 펩시맨이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던 건 그의 행동이 늘 누군가를 위함이었기 때문일 테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고 늘 발을 헛디디거나 착지에 실패하는 등의 어설픈 마무리로 퇴장하지만, 진의를 알기에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석도 비슷하다. 팟캐스트 녹음 날엔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널브러져 맥주 몇 캔을 까며 먼 산을 보고, 레트로 게임기를 손에 넣기 위해 어떻게든 누님 a.k.a 바깥양반을 구슬리고, 그러다 이따금은 혼쭐이 나기도 하지만 그가 얼마나 바깥양반을 아끼는지 눈치가 둔한 나라도 쉬이 알 수 있다.

누님도 마찬가지. 폭설을 뚫고 세 건의 당근마켓 거래를 성사시킨, 신혼부부에게 위를 괜찮은 가격에 팔고 사용법도 하나하나 다 알려줬다며 자랑하는, 관석을 어이없어 할 때도 그랬다. 한창인 대화 도중 기어코 총싸움 게임을 세팅하는 관석에 혀를 찰 때도 역시나. 예외없이 해사한 표정이다. 전날 어깨에 바짝 힘을 주고 긴장한 채 무서운 게임을 한 나머지 담이 와 너무 아프다는 관석을 걱정하며 챙길 땐 정말이지, 이게 부부지정이지 싶어 웃음이 나기도 했다.

펩시맨 게임은 1인용이다. 하지만 혼자서 게임을 한다고 느꼈던 적은 없다. 단지 차례를 주고받았을 따름이다. 너 한 번 나 한 번 너도 한 번 패드를 번갈아 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구경을 할 때도 플레이어 못잖게 몰입해 화면 속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하고 탄식했다. 그때 그 장면을 인화한다면, 조그마한 브라운관 앞에 앉은 꼬맹이들이 여섯 개의 손으로 패드를 감싸고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사진이 나올 것이다.

관석네도 이와 같지 않을까? 조악한 그래픽에 실력도 변변찮아 휴지통에 걸려 넘어지거나 맨홀에 빠지기 일쑤, 도저히 끝판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한 우주를 유영했던 유년의 우리들처럼, 두 사람도 두 사람만의 방식으로 두 사람만의 유니버스를 탐험하고 있겠지. 좌충우돌하는 와중, 한가운데 뿌리 깊은 사랑을 키워가면서. 이들의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세상에 고한 이가 바로 나요, 자랑하고플 만치 귀여운 궤적을 그리면서 말이다.

진수성찬에 맛난 술을 곁들이는 저녁 내내,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단카 중 관석이 가장 좋아한다던 구절이 떠올랐다.

친구들 모두 나보다 잘난 듯이 보이는 날은
꽃다발 사들고 와
아내와 오순도순

이걸 내 식대로, 관석네 버전으로 조금 바꾸면 다음과 같다.

바깥양반이 평소보다 시무룩해 보이는 날은
게임기 팔고 와
부엌에서 복닥복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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