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 Photo, 17
그림자를 좋아한다. 어릴 적엔 종종 녀석이 무서워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 “쟤가 자꾸만 쫓아와”하고 엉엉 울기도 했었다. 처음 고속도로를 달리는 아이가 창밖을 응시하며 “엄마, 달은 왜 계속 우리를 따라올까?”하고 묻는 것과 비슷했달까. 틈만 나면 장롱 속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시간을 보냈던 것도 어쩌면 그림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참, 제법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그리도 그림자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것이 까닭 모를 우울함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빛의 진로를 가로막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생겨난 결여의 결과물’이라는 그림자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를 그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문장 역시 나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억지로 조립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당시엔 정말 그냥 그것이 그저 두려웠다.
자신의 그림자가 공포의 대상이었던 반면, 언제부턴가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의 그림자에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찾아갔던 꽃동산에서도 나는 그들과는 다른 각도로 세계를 감상했다. 축구 경기를 구경하면서도 나의 눈은 공을 좇고 있지 않았고, 휘영청 둥근 달이 뜬 날이면 습관처럼 보름달 주변의 어둠을 헤아렸다. 허세롭고 허세롭던 유년 시절.
이것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기는 했다. 알고 보니 나란 놈이 그림자 덕후였단 진실을. 증오하는 대상을 닮아가는 것과 유사한 원리이거나, 아니면 스톡홀름 신드롬 비슷한 뭐 그런 것 아닐까?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은밀하게 숨겨진, 스스로는 감추고 있는 ‘진짜’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으니 일종의 관음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공동(空洞)을 향한 응시가 결국엔 쓸쓸함으로 마무리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나의 그림자를 기피했던 것도 내가 아닌 것의 그림자를 사랑했던 것도 다,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을 테니까. 외면하고 싶었고 동시에 감싸 안고 싶었던, 그러니까 나의 결핍으로부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대체로 세상에 무심했던 내게 가장 명확한 감각이 쓸쓸함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랬나.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이따금 향기로운 그림자를 만나곤 한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림자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재미있는 건 그림자놀이를 오래 하다 보면 그 찰나가 도래하기 직전에 미리 찌릿, 하고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진짜다. 궁금하다면, 다시 사진을 보라.
어때?
Writing. by 승재
그림자야말로 색(色)이다. 존재하게 되어, 변화하고 소멸된다. 그러나 색이 있기 전에 항상 빛(光)이 있다. 빛이 있으므로 비로소 거기엔 형상이 있는 것이다. 색을 보기도 전에 빛을 볼 수 있는 자(者), 그 숭고한 목표로의 길 위에 사진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Photo. by 임스
함께 서로 쓰.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