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 그냥 하자.
13년 만에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던, 내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일이었다. 유튜브 채널 운영으로 용기를 얻은 나는 이 오랜 숙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도서관에서 포트폴리오 기획을 시작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작성 써내려 갔다. 이때 내 생각의 깊이는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얕았다. 그러다 힌트를 얻었고,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 틀을 우선 잡고, 구체적인 요소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이 폐장하는 시간까지 1차 초안을 완성했다.
짐을 챙겨 어두운 도서관 주차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뜬 듯 가벼워졌다. 마음속 무거운 짐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 그동안 시작조차 못해 스스로를 질책하던 긴장과 불안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홀가분함.
참 이상했다. 오늘만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두렵지 않았다.
기획단계 1차 완성했으니, 2차도 금방이다.
내일은 기획마저 다듬고 디자인 시작해 보자!
…시작 못했다.
다음날, 배탈 나서 골골대느라 손도 못 댔다.
그래도 괜찮다. 그다음 날 하면 되니까.
…그다음 날도 나는 기획안과 내외하기 바빴다. 성취감에서 왔던 홀가분함은 점점 잊혀가고, 다시 질책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책상 위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시작만 해도 일류다.]
[완벽하게 할 생각 말고, 완성을 하자.]
잊을 뻔했다. 나는 완벽하게 해낸 적이 없다는 걸.
그래, 시작만 해도 일류라는데... 해보자.
책상 위에 흩어진 이면지 중 하나를 집었다. 볼펜으로 낙서하듯 모든 일정을 휘갈겼다. 프로젝트마다 필요한 기간을 표기했다. 쫓기듯 촉박하게 시간을 매겼다. 그때,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 시간 안에 해낼 수 있어?”
“왜 이렇게 관대하질 못해? 지독하다…”
마음의 소리가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나한테 조금 더 관대해지기로 했다. 일정을 여유롭게 늘려, 한 달 일정으로 변경했다.
탁상 달력에 일정을 옮겨 적었다. 프로젝트명을 적고, 기간이 잘 보이도록 형관펜으로 칠했다. 주 단위 스케줄러에는 세분화한 일정을 하나하나 작성했다.
그러다 완벽을 추구하려 들면 다시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나대지 말고 가볍게 시작하라고.
바로 노트북 셋팅을 했다. 전원을 켜고 기획 초안을 다듬었다. 1차 초안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뽑아놨던 게 도움이 됐다. 기획을 완성했다.
집중력 게이지가 최고조에 달해 멈출 수 없었다. 그동안 침대에 누워서 수집해 뒀던 참고자료들이 쓸모를 발휘할 시간이었다. 한 화면에 취합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군더더기 없이 본문에 집중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컨셉을 잡았다.
기획 2차 단계에서는 연필로 스케치하듯, 색이나 디자인 없이 글과 이미지 위치만 정하는 화면 설계도를 먼저 만들었다.
다음날도 집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점심시간을 제하고 하루 4시간은 작업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대부분 4시간을 초과하여 작업을 이어갔다. 몰입되어 하루치 일정을 격파하고 다음날, 다다음날 일정까지 끝장내버리는 나답지 않은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너무 몰입하다 소진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기처럼 엄습해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다 내려두고 도서관에 가거나, 공원을 걸었다.
잘 풀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었다. 안 되는 거 붙들고 늘어지면 스트레스만 쌓이고, 회피하게 된다. 차라리 정신을 가다듬고 내일 하자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코인노래방에서 18곡을 목이 터져라 부르거나, 만화방에 가서 좋아하는 만화책을 보았다. 그럼 스트레스가 싹 해소 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기쁨을 주최할 수 없어 내 회사동기이자, 베프 아영에게 연락했다.
“아영아, 나 포폴 끝냈어. 진짜… 불태웠다. 퀄리티 무시하고 일단 완성했어.“
“야, 장하다. 진짜 잘했다, 내 친구. 고생 많았어. 근데 나는 어떡해? 나도 해야 하는데...”
“이런 나도 하는데, 넌 왜 못해. 더 잘할 수 있어.”
정말이다. 나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누구든 시작을 미루고 자책하다가, 막상 해내면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완벽이 아닌, 완성을 목표로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이 포트폴리오가 최종 마무리는 아니다. 일단 구직활동을 시작하고, 반응을 살피며 다듬어 나가기로 했다.
나는 모니터 화면 속 구직사이트를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제 입사지원을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