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내는 약속
길고 긴 방학이 끝났다. 낮 시간만큼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두근거림이 완화되었다.
본격적으로 포트폴리오 제작을 준비했다. 오전에는 집에서 모니터 두 대로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예상기간은 한 달, 하루 4시간씩 투자했다. 그리고 13년 동안 미뤄뒀던 포트폴리오 제작을 보름 만에 끝냈다.
오랜만에 윤지를 만났다. 그 사이 윤지는 취업을 했고, 넉살 좋은 성격 덕에 빠르게 적응한 듯 보였다. 내 엉망인 몰골을 보고 놀란 윤지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그녀는 탕수육과 자장면을 본인의 카드로 계산했다.
“야, 밥심으로 이겨내야 돼.”
“우리 빈 사무실 많아. 내가 얘기해 둘 테니 와.”
자기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으면서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윤지에 메말랐던 웃음이 터졌다. 불안했던 심리가 잠시나마 안정되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식욕이 돌아왔다.
개나리와 벚꽃이 폈다. 공원에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낮에는 노인들과 유모차를 끈 보호자들이 종종 보였다. 겨울에는 보이지 않던 선교인들도 거리로 나왔다. 전단지와 물티슈, 종량제 봉투, 간식거리를 나눠줬다. 도서관 책상 닦을 때 유용해서 감사히 받았다. 잔바람에 벚꽃 잎이 날렸다. 슬로우 모션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아름다웠다.
선호하는 자리가 생겼다. 겨울을 함께 보낸 창가자리가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자리였다.
매일 도서관에 방문하면서 익숙한 얼굴들이 생겼다. 하지만 오가며 얼굴만 익혔을 뿐, 우린 서로를 모른다. 야외에서 통화 중이었는데, 누군가 문 밖으로 나왔다. 중년 남자, 멀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외관. 전화로 실업급여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실업자였다.
퇴직자, 공시생, 취준생, 학생, 실직자. 그들은 도서관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할 일을 정했다. 집중해서 목표를 처리하는 사람, 잠시 피로를 보충하는 사람, 핸드폰만 보는 사람. 묘하게 익숙한 이 느낌. 그들이 마치 같은 사무실을 공유하는 직장 동료처럼 느껴졌다. 사무실을 함께 쓴다고 모두와 말을 트고 지내는 건 아니니까.
도서관이 편해졌다. 미디어실, 열람실, 자료실을 찾을 때마다 내 루틴은 각각 나뉘었다.
미디어실 : 노트북으로 쇼츠를 만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 1~2주일 치 분량을 만들었다. 아이패드로 조금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열람실 : 빈자리에 앉아 영어공부를 했다. 칸막이로 나뉜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자주 찾진 않았다.
자료실 : 창가에 앉아 일기를 쓰고, 책을 읽었다. 내 기억력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읽은 책을 노션에 정리했다. 독서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뿌듯했다. 평생 읽을 독서량을 올해 다 채운 것 같았다.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곧 여름이다. 날이 더워지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씻을 텐데, 긴 머리는 기동력이 떨어진다.
도서관에 갈 땐 편하지만 단정한 차림으로 방문했다. 매일 보이던 퇴직자 한 분이 항상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도 모자를 쓰지 않았다. 직장에 다닐 때처럼.
창문을 활짝 열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외부 소음이 집안으로 들어오며, 아파트 내부 소음이 묻혔다. 마치 야외에 사는 기분이었다. 남들이 기피하는 차량 주행 소음, 버스 시동음, 오토바이 소음은 내 제세동기였다. 혹시라도 아파트 내부 소음이 지속될 것 같으면, 성능 좋은 귀마개로 차단했다. 기분은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도서관에서 글쓰기 특강을 들었다. 과제물도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종강한 뒤, 작법서 코너를 살펴보았다. 더 배우고 싶고,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아직 수업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한숨도 못 잔 날이었다. 이대로 잠들면 밤낮이 바뀔 것 같았다. 잠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향했다. 직장에 출근할 땐 밤을 새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출근은 해야 했으니까. 나는 이미 내가 도서관에 출근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꾸준히 약속을 지켜나가면 내 일상이 다시 회복될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