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히로시마 여행 Day 1
여행 첫날부터 망하는 건 내 전통이다.
과거 공항 리무진이 만원이라 다음 차를 기다리느라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이 있다. 이날 이후 여행 당일이 되면 걱정이 앞서 잠이 안 온다. 바이오리듬이 망가지며 여행 첫날은 대차게 말아먹는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이번 여행 역시 그랬다. 망조가 깃들었다.
#01
내일 아침 첫 비행이라 늦지 않으려 인천공항 근처 저렴한 숙소를 예약했다. 원룸형 오피스텔을 개조해 반으로 쪼갠 방이었다. 후기에 방음 문제가 있던데,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까.
10월 초 일본은 반팔과 반바지만 챙겨도 되는 날씨다. 하지만, 강화도의 밤은 상상 이상으로 추웠다. 가져온 긴팔, 긴바지를 모조리 껴입고 종잇장 같은 홑이불까지 둘둘 감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방 안에 히터 같은 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 자식이 찬바람만 뿜어냈다. 치아가 딱딱 부딪혔다. 이대로 있다간 냉동육이 될 것 같았다. 10월 초에 전기장판이 간절했다. 결국 한숨도 못 자고 냉동창고에서 탈출했다.
#02
시트에 몸을 기대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내 엉덩이를 성실하게 주무르는... 무언가.
이야, 요즘 저가항공사는 시트에 안마기도 설치해 주나.
도끼눈을 뜨고 돌아보니 초등생 여자애가 무릎으로 내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어린애였다.
저가항공사 의자 간격과 각도를 몸이 기억하는 나와 달리 이 애는 불편함을 온몸으로 호소했다.
이코노미 클래스, 인류의 엉덩이를 가장 저렴하게 취급하는 현대의 계급.
위대한 자본가들은 계산했다.
우리의 좌석 간격이 29인치만 돼도 인간은 죽지 않는다고. 팔걸이는 한 명분만 있어도 된다고. (팔걸이는 가운데 앉은 민첩한 남자가 양쪽 다 차지하고 있었다)
여행 초반이다. 누구도 내 기분을 망칠 수 없다. 애 엄마에게 조준되었던 말을 삼키고, 도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여전히 계급에 저항했고, 나는 자본에 굴복했다. 저항군의 성실한 무릎에 엉덩이를 내줬다.
#03
히로시마 공항에서는 기사님이 리무진 짐칸에 캐리어를 직접 실어주셨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에서는 본인 스스로 꺼내야 했다. 하필 내 짐은 짐칸 맨 안쪽에 박혀 있었다. 뒤늦게 내 차례가 왔다.
짐칸은 높이가 매우 낮았다. 나는 짐칸에 머리를 숙이고 기어들어 갔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다 짐칸 천장에 머리를
꽝!
빛이 번쩍 하며 철판이 메아리치는 둔탁한 소리. 내 두개골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다.
꽝!
옆에서 짐 꺼내던 아저씨의 두개골도 비명을 지르며 입체 서라운드를 완성했다.
둘 다 정신 못 차리고 짐을 마저 끌어내는데 옆에서 그의 아내가 어린 아들에게 다정히 말했다.
“아빠 지금 머리 쿵 하셔서 아파~”
“아빠 아파?”
그의 아들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
아저씨는 대답이 없다. 아니, 그럴 경황이 없는 거다.
#04
히로시마의 랜드마크, 원폭돔에 갔다. 원폭돔 근처에는 가이드 따라온 관광객 무리, 선생님 따라온 학생들로 북적였다. 관광도 하고 공원도 걷고 싶었지만 장대비가 쏟아졌다. 가까운 혼도리로 피신했다. 다리도 좀 아프고 허리도 욱신거려 드럭스토어에서 효과 좋은 파스를 몇 개 샀다.
#05
돈키호테는 둘째 날 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떠서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들어갔다가 끝장 보고 나왔다.
짜장이냐 짬뽕이냐의 갈림길에 선다면 솔로몬도 짬짜면을 택할 거다. 나는 전통이냐, 현시대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여기에 짬짜면 같은 건 없다.
기모노 입은 마이멜로디냐 하트 모양 헤드폰을 착용한 MZ키티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 키티를 담았다. 이 시대를 간직하기 좋은 컨셉이었다. 심지어 키티가 진짜 고양이처럼 앉아 있다. 오늘 최고의 수확이라 기뻐하는데
…예정일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왜? 왜 해외여행만 오면 이러는데. 여행 첫날인데! 나한테 왜 그러는데... 왜!!! (빼액!!!)
생리대를 처담아... 장바구니가 미어터져... 덕분에 일본 가성비 오버나이트 생리대를 알게 된 건 수확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쇼핑의 전리품을 들고 숙소까지 걸어갔다.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풀리며 생리통이 수문 터지듯 몰려왔다.
여행 첫날은 망한다는 유서 깊은 전통이 오늘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