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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다시 만난 너, 골드코스트

8살 아들과 호주 한 달 여행 이야기 중 골드코스트 편

by 슬로우모닝


오전 7시, 43층에서 바라다보는 골드코스트 바다는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물결 위를 항해하는 다양한 모양의 배들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해 준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부둣가에도 수십 대가 질서 있게 정차되어 있다. 지금 보이는 창문 너머 풍경은 호주 골드코스트의 마리나미라지이다. 6성급이라고 불리는 럭셔리 호텔 베르사체와 고급 휴양지 쉐라톤 그랜드 마리나 리조트를 중심으로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요트 세일링과 헬리콥터 탑승과 같은 고급 체험을 즐길 수 있다.


2025년 1월,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과 한국의 매서운 추위를 뒤로 하고, 뜨거운 여름을 달리고 있는 호주에 입성하였다. 시드니로 입국하여 20여 일의 여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은 20대의 기억들이 묻어있는 골드코스트와 브리즈번에서 마무리할 예정이다. 호텔 베란다에 서서 바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이 순간, 내 심장은 젊은 날의 추억들을 소환할 수 있다는 설렘에 두근거린다. 엄마의 계획을 아직 모르는 아들은 침대 위에서 평화로운 늦잠을 즐기고 있다. 지구 남반구의 햇살로 까맣게 타버린 얼굴, 팔, 다리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여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모자는 어제 국내선을 타고 시드니에서 골드코스트로 넘어왔다. 호주에서 6번째로 큰 골드코스트는 현지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제주도와 같은 휴양 도시이다. 1년 중 360일 이상 해를 볼 수 있고,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42km 백사장은 전 세계인들이 찾는 매력적인 여행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골드코스트의 여유로운 삶 때문인지, 타도시보다 훨씬 친절하다. 그래서 나는 아들과 15년 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고, 골드코스트 공항에서 우리 모자를 호텔까지 데려다준 택시 아저씨는 역시나 시드니 택시 아저씨들보다 10배는 친절했다.


아들과 머물 숙소는 사우스포트에 위치한 메리톤 호텔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머무는 서퍼스파라다이스가 아닌 이곳에 숙소를 잡은 이유는 한 때 살았던 동네이고, 그 당시 거닐었던 추억들을 되짚어보고 싶어서이다. 아쉬움이 컸던 지난 헤어짐이 늘 마음에 남았고, 기회가 된다면 더 아름답게 매듭짓고 싶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방과 거실로 이어지는 통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진, 지상천국 같은 풍경은 아들의 마음에도 쏙 들었나 보다. “우와!! 엄마 여기 정말 좋다.” 하고 환호성을 여러 번 외치더니, 아빠에게 보여줘야 한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자세를 취한다. 아들도 기분 좋게 골드코스트 첫 여행을 시작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이제 나가볼까? 여기서 조금 걸어가면 큰 쇼핑센터가 있어. 엄마가 예전에 여기 살 때 자주 가던 곳이야.” ‘오스트레일리아페어(Australia fair)’, 한국의 스타필드와 같은 쇼핑센터이다. ‘아직도 예전 그대로일까?’ 궁금함이 확 밀려와 아들을 재촉한다.


그런데 밖을 나서자, 예상과는 달리 낯선 풍경들뿐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넘은 기간 동안 골드코스트도 눈부신 발전을 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로 위에는 예전에 없던 G-link라고 불리는 트램이 지나다닌다. 물론 우리의 목적지까지도 트램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동네를 직접 보고 싶어 걷기를 선택한다.

한 손은 꿀호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은 구글 지도를 보며 낯설지만 익숙함을 조금이라도 찾으려고 두 눈을 번쩍 뜨고 천천히 걸어본다. ‘어, 여기 테니스장은 그대로구나. 단골로 다녔던 한국식당은 없어졌네.’ “엄마 다 와 가?” “어어” 늦은 오후였지만 뜨거운 호주 여름 열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고, 더위에 유난히 힘들어하는 꿀호에게 걷기는 쉽지 않았다. 서둘러 쇼핑센터 입구를 찾았다. ‘여기가 후문인데. 이렇게 들어가는 거였지.’ 다행히 그대로였다. ‘너는 잘 버티고 있었구나. 반가워’하고 얕게 숨소리를 내뱉는다. 그런데 이런, 운영시간을 미처 확인을 못 했다. 쇼핑센터에 들어온 시간은 17:50분, 영업 종료시간은 18:00시. 남은 10분 동안 꿀호의 손을 잡고, 1층에서 4층까지 후다닥 둘러본다. 그렇게 4층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나오려는데, 여기가 종착점이 아니었다. 중간에 다리가 연결되어 도로 건너편에 신관이 새로 생긴 것이다. ‘헉, 이렇게나 발전했구나. 너의 동생은 내일 다시 보러 올게.’ 눈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려 거리로 나온다.


그제야 아들에게 저녁을 먹여야 한다는 엄마의 본능에, 주변 식당을 둘러보고 그래도 구글 평점이 좋은 일본 식당 한 곳을 들어가 벤또(일본도시락)와 아들이 좋아하는 우동을 시킨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로 꾸며놓은 작은 식당은 친절함과 아늑함 그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 모자에게 만족할만한 저녁을 선사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를 나오니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다시 숙소로 걷는다. 호주는 안전한 나라이지만, 멀리 타지에서 엄마와 어린 아들 둘이서 해가 진 조용한 거리를 걷자 온몸에 긴장감이 돌아 걸음이 빨라진다. 다행히 호텔 근처에 다가오니,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에 안정을 찾는다. 마침 호텔 옆 리콰이어 숍에서, 오늘의 긴장을 가장 우아하게 풀어줄 레드 와인 한 병을 산다. 가게 주인이 “Have a good night!”하고 방긋 웃으며 인사해 주고, 나도 “You, too!”하고 기분 좋게 대답해 준다.


‘골드코스트야, 그동안 잘 지냈지? 너의 흔적들을 잠깐 보았는데, 못 알아볼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했더구나. 예전 모습이 그리워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네. 정말 수고 많았어. 나와의 옛 추억들도 잘 간직하고 있겠지? 네가 선사해 준 눈부신 기억들로 나도 지금까지 잘 버텨왔어. 이번에는 소중한 보물 아들도 데리고 왔단다. 20년 전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을 내게 주었듯이, 이번에는 내 아들에게 한가득 부탁해. 그 기억들로 우리는 한국 가서 또 잘 살아볼게. 그리고 다시 네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 나는 너를 또 찾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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