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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14. 2021

빠삐용이 탈피시킨 것

빠삐용이 탈피시킨 것, 영화 <빠삐용 Papillon>, (2017)

*papillon 나비, 프랑스어.


영화는 실화로, 감출 것 없는 이야기다. 강인한 의지의 주인공 빠삐는 누명을 쓰고 들어간 감옥에서 끝 없는 사투 끝에 지옥의 섬에서 탈옥하고 남은 생을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다만 영화에서 탈피하여 변태하는 성장의 역할은 빠삐의 것이 아니다. 그의 야위고 나약한 조력자 드가는 8년의 시간 동안 이야기 속에서 가장 생동하는 존재다. 빠삐는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라기엔 신념의 수정이나 믿음의 변화로써 성장하지 않는다. 대신 굽어지지 않는 삶의 의지가 웬만한 영웅들과 비교해도 심심하리만치 될성 부르고 비범한 인물로, 그의 서사는 곧장 앞으로 나아갈뿐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나와 같은 불안한 눈빛으로 삶을 경외하는 존재는 드가다. 우리 삶에는 변화를 기점으로 작동하는 특정한 시공간의 문턱이 몇 개 있다. 그들의 수감 생활도 마찬가지다. 본토에서 수용선으로, 수용선에서 감옥으로, 감옥에서 독방, 독방에서 지옥의 섬으로. 이야기는 빠삐의 시선을 통해 진행하지만 바뀌는 시간선마다 다시 만나는 드가는 자꾸만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만큼 느리게 성장하는 인간. 빠삐가 처음 독방에서 2년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드가의 검게 타고 망가진 피부를 들여다보며 우리가 나약한 인간에게 닥쳐온 세월을 짐작하는 사이에 그는 서사의 한가운데로 옮겨 온다. 단 하룻밤도 혼자 버틸 수 없을 것만 같던 나약한 드가는 빠삐가 없는 이 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영화는 그가 교도소장의 서기가 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대신 제출하지만, 이내 드가는 초기의 모습과 대비되는 태도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감옥 살이 초반, 빠삐는 드가의 돈을 노리는 무리와 부딪혀 드가 몫까지 싸우며 상대의 살점을 입으로 물어뜯는다. 그 당시의 드가는 샤워장 진흙탕 위에 한 번 구른 것만으로 기력을 잃었다. 빠삐가 독방에서 살아돌아왔을 때, 드가는 어느새 괴롭힘에 저항하기 위해 상대의 손목 정도는 물어 뜯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빠삐가 없는 동안 드가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한 것이다. 또 한, 2년 전 빠삐가 드가를 구하기 위해 간수를 덮친 형벌로 독방에 갇혔을 때, 드가는 얼마남지 않은 돈을 써서 코코넛을 보낸다. 코코넛은 빠삐가 지독한 독방 생활에서 이성과 기력을 잃지 않도록 돕는 동아줄이었다. 하루하루가 파리 목숨 같은 곳에서 드가는 빠삐를 살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드가는 약한 인간이다. 나약한 몸과 마음은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덕목들을 발달시킨다. 연민과 동정, 우정과 공감 능력 같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흔히 갖는 특성은 온갖 독종들 사이 빛을 발하는 드가의 특출함이 된다.


출처 네이버 영화


다시 한 번 탈옥을 준비할 때 드가는 단순히 돈을 지불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할을 수행하는 일원이다. 간수들을 재우고, 폭우로 전기가 나가자 임기응변으로 다른 경로의 열쇠를 훔쳐온다. 빠삐는 더이상 드가에게 해줄 것이 없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지만 탈출하기엔 택도 없는 배 위에서 함께 탈출한 이가 생존을 계산해 드가를 버리려 한다. 다시 한 번 영화 초반으로 돌아간다. 교도소로 이송될 때에 드가의 생명을 위협하던 죄수의 칼을 막은 빠삐는 얼빠진 얼굴로 눈앞의 죽음을 바라보던 드가에게 떨어진 칼을 집으라고 소리친다. 몇 년 전 얼떨떨하게 칼을 집어 들던 드가는 이제 탈출하는 배에서 떨어진 칼을 집어 상대를 몇 번이고 내리 찍는다. 드가는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무늬가 찍히는 장면마다 껍데기를 하나씩 탈피한다.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장동선 박사는 갑각류 이야기를 한다. “갑각류는 안은 말랑말랑 한데 겉이 단단해요. 근데 그럼 어떻게 성장을 할까요? 갑각류는 크기 위해 허물을 벗어요. 탈피의 순간, 갑각류는 누구에게든 잡아먹히고 상처 받을 수 있어요. 재밌는 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때는 오직 내가 가장 약해지는 그 순간인 거예요. 저는 인간의 몸은 척추동물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게나 가재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죽을 것 같고, 잡혀먹을 것 같고, 스치기만 해도 상처받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우리는 크고 있는 거잖아요.”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가 마음 먹고 드가의 내면을 파헤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있다. 드가와 빠삐는 모두 애인을 두고 교도소에 들어오지만, 애인의 변심과 마주하는 건 드가 뿐이다. 빠삐는 연인이 기다릴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눈치다. 드가는 교도소에서 공책을 구해 연인의 모습을 그렸다가, 빠삐의 조롱에 그녀의 이목구비를 지운다. 그는 죽음의 섬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건물 내벽에 그림을 그리며 수감 생활 동안 겪은 변화의 모습을 다시 밖으로 꺼낸다. 긴 역사로부터 철학이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해온 오늘날, 철학 분야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논문으로 쓰이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미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세상을 수도 없이 그려냈다. 우리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제는 미술이 개인의 내면으로 집요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는 드가를 통해 그 집요한 과정을 드러낸다.


출처 네이버 영화


드가는 그림을 그린다. 인간 내면과 세상의 불화가, 인생의 온갖 달콤 씁쓸한 맛이 그 안에서 응축하여 선과 색으로 뿜어져나온다. 그는 빠삐라는 세상의 단순하고 선명한 모습과 떨어져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해갔을 것이다. 안전을 지켜주는 빠삐와 실제로 함께 한 기간은 무척 짧았다. 기댈 곳은 자주 무너지지만 우리는 의지하지 않는 순간에 이름을 얻는다. 그곳이 우리가 원하는 마지막은 아니었을지라도. 드가는 빠삐에게 자신의 이름인 루이로 부르라 했지만, 그 이름은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다. 빠삐가 탈출을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았을 때에야 화면 가득 담긴 드가의 얼굴 위로 빠삐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드가의 이름, 루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가 진득하게 살아내고 도출한 인생의 결과값을 스스로 선택한 뒤에야 그는 이름 불린다.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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